“엔비디아, 퀄컴, AMD도 인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고객사가 됐으면 합니다. 인텔은 전 세계를 위한 (AI 반도체) 제조 공장이 될 것이며, 참여를 원하는 모든 기업에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21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 2024′ 포럼에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겔싱어 CEO는 젠슨 황(엔비디아 CEO), 크리스티아노 아몬(퀄컴 CEO), 리사 수(AMD CEO) 등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들의 CEO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기도 했습니다.
겔싱어의 발언이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가 열거한 기업들이 사실상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들이기 때문입니다. AMD의 경우 인텔의 텃밭인 PC,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인텔을 위협하는 기업이며, 엔비디아는 인텔에 앞서 AI 반도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기업이죠. 인텔이 넘어야 할 큰 산이기도 합니다.
◇ 협업구조로 진화하는 AI 반도체 시장, 인텔의 ‘큰 그림’
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첨예한 경쟁 구도를 구축한 후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에 더 이상 일감을 맡기지 않듯이, 경쟁 기업의 반도체 위탁생산을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파운드리 사업의 특성상 설계와 제조 부문에서 밀접한 파트너십이 필요하고, 자칫하면 칩 설계의 중요한 특징이나 강점이 경쟁사에 유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반도체 설계, 생산 구조에서 인텔의 이 같은 개방형 파운드리 선언은 말이 안 되는 얘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AI 반도체 생태계로 관점을 옮겨보면 아주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AI 반도체의 등장과 함께 설계, 제조, 패키징 등의 과정이 기존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힘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이날 질의응답에서 겔싱어 CEO는 “올해 인텔은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할 것”이라며 “IFS의 목표는 심플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광범위한 고객층을 보유한 독립 파운드리 회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고객사는 인텔의 첨단 프로세스 노드를 사용하길 원할 것이고, 어떤 고객은 패키징만, 어떤 고객은 조립과 테스트만 맡기고 싶을 수도 있다. 인텔은 모든 과정을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겔싱어의 발언을 보면 인텔은 향후 AI 칩의 생산 구조가 다수 기업 간의 합종연횡에 따른 협업 구조가 될 것이라고 관측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 최첨단 칩의 패키징 방식은 칩렛(Chiplet) 형태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칩렛은 하나의 칩에 서로 다른 종류, 다양한 기능의 칩을 레고처럼 자유롭게 붙이는 기술로, 더 낮은 비용에 고성능 칩을 높은 수율로 구현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실제 인텔이 최근 내놓은 메테오레이크도 일부 공정을 TSMC에 위탁하는 칩렛 방식이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생성형 AI 인프라의 핵심인 ‘H100′ 같은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AI 반도체들도 사실 이종 기업들 간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AI 프로세서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엔비디아, AMD가 설계해 TSMC가 제조를 맡고, 여기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함께 개발·생산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TSMC가 받아 별도의 패키징 작업을 거쳐 완성합니다. TSMC 입장에서는 경쟁사인 삼성의 메모리를 쓰는 것이 탐탁지 않더라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 파운드리 2위 자리 위태로워진 삼성전자
인텔은 이날 1.8나노 공정(18A)을 올 연말부터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당초 양산 시작 시점은 2025년부터라고 계획을 밝혔는데, 앞당겨진 셈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5나노 이하 최첨단 파운드리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TSMC와 삼성전자뿐입니다. 현재 최신 공정인 3나노의 경우 시장 대부분을 TSMC가 장악하고 있고, 삼성전자가 고객사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파운드리 시장의 최대 관건은 고객사 확보이고, 고객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정성과 수율, 경험이 핵심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한 인텔이 과연 얼마나 완성도 있는 서비스를 선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CPU 시장에서 축적해온 노하우, 미국 빅테크 기업들과의 오랜 기간 이어온 밀접한 파트너십이 시장 진입을 가속화하는 동력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인텔은 1.8나노 공정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새로운 AI 칩을 생산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인 칩 종류는 밝히지 않았지만, MS가 지난해 발표한 ‘마이아’라는 AI 프로세서로 추정됩니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사전 녹화된 영상을 통해 “가장 진보되고 고성능이며 고품질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하다”며 “그것이 우리가 인텔과 함께 일하는 것에 매우 흥분하는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인텔은 파운드리 수주 물량이 지난해 말 100억달러 수준에서 현재 150억달러로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MS 수주 물량이 늘어난 영향이라는 분석입니다. 현재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연매출이 200억달러 수준이라는 걸 감안할 때 작은 규모가 아닙니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한 게 2021년이고, 삼성전자가 별도로 파운드리 사업부를 출범시킨 게 2017년인데, 격차가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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