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가격 하락세가 심상찮다. 중국 제조사가 1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값을 내려 판매하겠다고 나섰다. 자칫 치킨게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전기차 대중화의 길이 열릴 거란 기대가 교차한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저가형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강자인 중국 CATL은 최근 전기차용 배터리셀 가격을 더 낮춰 잡았다. 올해 주력 배터리셀을 Wh(와트시)당 0.4위안 이내로 공급하겠다고 자동차 기업에 제시한 것. 지난해 초 LFP 배터리 가격이 Wh당 0.8∼0.9위안, 지난해 8월 0.6위안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한 내림세다.
전기차엔 배터리셀을 모아 만든 배터리팩 형태로 탑재된다. 이를 배터리팩 가격으로 환산하면 kWh(킬로와트시)당 75달러 수준까지 떨어진 셈이다. 골드만삭스가 전망한 올해 글로벌 배터리팩 평균 가격인 120달러를 한참 밑돈다. 중국산 LFP 배터리가 한국의 삼원계(NCM) 배터리보다 저렴하다는 점을 고려해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가격은 지금보다 더 내려갈 수도 있다.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립모터의 차오리 수석부사장은 10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LFP 배터리 구매가격이) Wh당 0.4위안인데, 올해 안에 0.32∼0.35위안 범위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터리 가격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란 전망이다.
배터리 값이 이렇게까지 떨어지는 건 제조사가 낮출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핵심 원자재인 리튬 가격의 하락이다. 2022년 11월 t당 60만 위안까지 급등했던 탄산리튬 가격은 지난해 폭락해 현재 9만5500위안. 14개월 만에 84%나 떨어졌다.
한때 ‘하얀 석유’로 불리며 몸값이 높아졌던 리튬이지만 이젠 공급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전기차 시대를 내다본 기업들이 앞다퉈 리튬 채굴에 뛰어들면서 너무 빠르게 공급을 늘린 탓이다. 수요 증가 속도를 추월해 버린 것이다.
현재 리튬 가격은 생산원가(t당 6만∼8만 위안)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 이미 가격이 바닥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재고가 쌓인 리튬 생산 기업이 역마진을 감수하고 재고 떨이에 나선다면 추가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세계적으로 전기차 수요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배터리 업체가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대 시장인 중국은 경제 둔화로 소비 여력이 줄어든 상황. 수요 위축으로 중국 배터리 공장의 가동률은 50∼60%로 떨어졌다.
미국·유럽의 전기차 수요 역시 눈에 띄게 감소했다. 신기술 수용에 적극적인 ‘얼리어답터’ 수요를 거의 다 채웠기 때문이다. 최보영 교보증권 연구원은 “혁신적인 제품이 얼리어답터 중심 초기 시장에서 일반 소비자의 주류 시장으로 넘어갈 땐 ‘캐즘(Chasm·아주 깊은 틈)’, 즉 침체기를 거친다”며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침투율이 16%를 돌파하면서 캐즘 단계에 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기업이 배터리 가격을 낮추고는 있지만 아직은 출혈 경쟁까진 아니다. 하지만 당분간 전기차 수요 회복이 어려운 가운데 배터리 재고가 쌓여간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배터리 업계가 우려하는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바로 치킨게임이다.
정진수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무역장벽에 가로막힌 중국이 세계적으로 내세울 산업이 전기차뿐인 상황에서, 무리해서라도 이 산업을 육성하려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라면서 “자칫 과거 디스플레이 산업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중국의 디스플레이 제조사 BOE가 저가 물량 공세로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장악했던 것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으로 눈을 넓혀 보면 배터리 가격 하락은 큰 기회다.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앞당길 수 있어서다.
전기차 값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 안팎. 지금처럼 배터리 값이 떨어지면 전기차 제조사는 그만큼 차 값을 낮출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와 가격이 비슷해지는 시점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지 모른다. 그동안 비싸서 전기차를 외면했던 소비자들까지 전기차로 눈을 돌린다면 시장은 확 커진다.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한국 배터리 기업은 중·저가형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군을 갖춰, 싸고 좋은 배터리를 찾는 완성차 기업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전기차 시장 초기인 만큼 어떤 배터리가 대세가 될지 단정하기 이르다는 점도 신제품 개발에 힘쓰는 이유다. 기존 삼원계 배터리보다 니켈 함량을 낮춘 ‘고전압 미드니켈’ 배터리, LFP 양극재에 망간을 추가한 ‘LMFP 배터리’가 그 예다. 최보영 연구원은 “앞으로 열릴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누가 잡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며 “한국 기업은 중국이 이미 장악한 LFP 배터리보다 한 단계 윗급에서 경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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