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함(旗艦). 한 자동차 브랜드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모델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는 군사 용어에 뿌리를 둔다. 해군에서 지휘관이 타는 배를 가리키는 말로 지휘관이 탄 배에 깃발을 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함은 함대에서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배로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함대를 상징하고 이끈다는 상징성이 있는 배다.
이 같은 역할과 상징성을 담은 은유적 표현이 자동차 분야로 넘어가 굳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자동차 업체나 브랜드의 제품군은 크기와 성능, 종류가 각양각색인 여러 모델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 임무에 따른 특징을 반영하는 다양한 성격과 종류의 함선으로 이뤄진 함대와 비슷하다. 그래서 브랜드의 기술이나 성능은 물론 크기 면에서도 가장 돋보이도록 만든 최상급 모델을 기함이라고 일컫는 것은 제법 어울리는 비유다.
오랫동안 대부분의 자동차 업체가 내놓은 기함의 장르는 세단이었다. 전통적으로 럭셔리 브랜드들이 내놓은 세단은 권위적이면서도 안정감 있는 스타일과 뒷좌석 탑승자를 중시하는 공간 구성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소비자들의 취향과 잘 맞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자동차 시장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인기가 높아졌고 21세기 들어서는 럭셔리 브랜드들도 SUV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SUV를 기함 모델로 내세우거나 SUV가 기함에 가까운 입지를 차지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일찌감치 주력 상품을 SUV로 전환한 미국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좋은 예다. 캐딜락은 현재 북미와 우리나라 등 주요 시장에서 기함 자리를 초대형 SUV인 에스컬레이드가 차지하고 있다. 크고 각진 차체에서 비롯된 에스컬레이드의 독특한 분위기는 하나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링컨 역시 본고장 미국에서는 SUV만 판매하고 있다. 2016년 내놓은 10세대 컨티넨탈이 판매 부진으로 2020년에 라인업에서 사라진 뒤로는 링컨의 실질적 기함은 초대형 SUV 내비게이터가 됐다.
럭셔리 브랜드의 기함급 SUV들만이 갖는 특징이 있다.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일반 SUV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뒷좌석 탑승자의 편의성과 안락함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좌석이 높은 위치에 있어 주변을 내려다보기 좋고 지붕이 높아 체감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이 크다는 SUV 고유의 장점을 살렸다. 그 덕분에 과거 세단이 맡아왔던 기함 역할을 넘겨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벤틀리가 최근 국내 판매를 시작한 벤테이가 EWB가 좋은 예다. 벤테이가 EWB는 벤틀리가 자사 SUV인 벤테이가의 차체 길이를 늘려 뒷좌석 공간을 넓히고 한층 더 호화롭게 꾸민 모델이다. 모델 이름 뒤에 붙은 EWB는 ‘휠베이스 연장’, 즉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는 뜻의 영어 표현에서 머리글자만 가져온 것이다. 벤테이가 EWB의 차체는 일반 벤테이가보다 180㎜ 더 긴데, 길어진 차체로 넓어진 공간은 온전히 뒷좌석을 위해 쓰였다.
올해 8월 우리나라에 처음 공개된 메르세데스-마이바흐 EQS SUV는 마이바흐 브랜드의 첫 순수 전기 SUV라는 점뿐 아니라 호화로운 뒷좌석으로도 주목받았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해 실내 공간을 넓혔고, 뒷좌석은 계단식으로 꾸민 센터 콘솔과 좌우 독립식 시트를 둘러싸는 듯한 독특한 굴곡으로 안락한 분위기를 갖췄다.
마이바흐 EQS SUV에 기본으로 설치되는 이그제큐티브 시트는 열선과 통풍, 마사지 기능은 물론 목과 어깨 부분까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온열 기능도 마련돼 있다. 종아리를 받쳐주는 부분에도 마사지 기능이 있어 이동 중에 피로를 푸는 데도 효과적이다.
SUV의 발전과 더불어 달라지고 있는 기함의 개념은 전기차 기술 발전과 맞물려 더욱 다양해질 듯하다. 차체 형태와 실내 공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단의 디자인이 100년 넘는 세월에 걸쳐 발전해 왔듯 40년 남짓한 역사의 SUV 역시 앞으로 발전할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나아가 소비자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SUV에 익숙해져 기함이 꼭 세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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