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EV5는 EV6, EV9에 이은 기아의 세 번째 전용 전기차 모델로 모듈화 및 표준화된 통합 플랫폼인 E-GMP를 적용한 전륜구동 기반의 전기 동력 차량이다. 기아의 ‘2023 기아 EV 데이’를 통해서 공개된 EV5의 크기는 전장 4615mm, 전폭 1875mm, 전고 1715mm, 휠베이스 2750mm로, 스포티지의 4485ⅹ1855ⅹ1635mm에 휠베이스 2670mm와 쏘렌토의 4815ⅹ1,900ⅹ1695mm에 휠베이스 2815mm와 비교하면 길이는 스포티지보다 130mm 길고, 쏘렌토보다는 200mm 짧다. 다른 치수도 스포티지와 쏘렌토의 중간 정도 된다. 그러나 높이는 이들 중 가장 높다.
이렇게 높아지는 건 스포티지와 쏘렌토가 엔진 차인 데 비해 EV5는 바닥에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닥에 배터리가 탑재되는 구조적 이유로 인해 전고가 높아짐에도 오히려 무거운 배터리로 인해 무게중심은 낮아지고 플랫폼의 강성이 높아져서 승차감이나 주행 성능이 유리해지는 것이 전기 동력 차량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전기차는 SUV에서는 장점을 가지지만, 전고가 낮아야 하는 스포츠 쿠페 등의 조건에서는 두터운 플랫폼으로 인해 낮고 늘씬한 차체 비례를 가지기가 쉽지 않다.
이미 기아 브랜드에서 내놓은 전기차 EV6와 EV9을 비롯해 이번에 공개된 EV 시리즈는 매우 전위적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단지 감각적 디테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조형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형태를 대하는 조형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기아 EV 시리즈의 이런 조형 관점의 차이를 보면, 문득 1907년에 천재 화가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화풍을 제시하면서 ‘아비뇽의 처녀들’ 이라는 그림을 내놓은 것이 떠오른다. 피카소의 그 그림은 이전까지의 사실 재현적 성향의 고전주의적 화풍에 대한 도전이었던 동시에, 그 당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제기한 시간과 중력이라는 다차원 이론에 자극 받아 3차원 입체의 인체를 2차원 평면의 화면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관한 피카소의 생각이 담긴 실험 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이 공개된 후에 데생 실력이 형편없다는 혹평부터, 예술성은 전혀 없이 선정적인 졸작이라는 평론가들의 공격 등 온통 비판 일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피카소의 그림은 기존의 사실적 회화에서 탈피해 20세기 새로운 추상 회화의 시대를 열어준 그림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피카소는 진정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기아 EV5를 보면서 피카소의 작품이 떠오른 건 이미 발표된 EV6, EV9을 비롯해 이번에 함께 공개된 EV3 콘셉트, EV4 콘셉트, EV5 등의 전위적 조형 차량이 바로 기존의 조형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모서리를 강조한 조형과 아울러 모서리를 따라 만들어진 후드 분할선 등은 기존의 차량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요소들이다. 차체의 면과 모서리뿐 아니라 휠의 디자인 역시 공기역학적으로 유리한 접시형 휠이면서도 모터의 회전자를 연상시키는 추상적 조형이다. 테일 램프의 그래픽에서도 배광 면적 확보라는 이전의 램프 디자인 관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선형 그래픽으로 디지털적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새로운 조형 작업을 전위적이라는 의미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불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본래 아방가르드는 군대가 진격할 때 맨 앞에서 이후의 행렬을 이끌거나 보호하는 전위부대라는 것에서 나온 말이지만,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시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폭 넓게 쓰이고 있기도 하다.
오늘 살펴보는 EV5를 비롯해 기아의 다른 EV 시리즈의 디자인 역시 기존의 틀을 깬 조형이다. 배터리 냉각을 위한 작은 그릴 이외에는 공기 흡입구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거의 막혀 있는 전면은 공기역학적으로도 더 유리한 것은 물론이고, 선형의 가는 LED를 이용한 램프 디자인 역시 과거의 커다란 반사경과 렌즈가 필요했던, 전구를 사용한 램프 디자인과는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기술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로도 나타난다. 디지털 기술에 의한 디스플레이 패널 채택과 변속기가 사라진 차체 구조로 인해 평평한 바닥으로 인한 수평 기조의 인스트루먼트 패널, 그리고 마치 벤치처럼 이어진 앞좌석 쿠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동력이 바뀐 걸로 그치지 않고, 기술적 변화가 구조와 공간 활용의 변화로 이어진 것을 보여준다.
자동차 디자인이 기술을 시각화 시켜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기아의 EV 시리즈가 보여주는 새로운 디자인은 기존 우리나라가 서구 선진 자동차 기업의 기술과 디자인을 흉내 내며 따라가던 시대에서 벗어나, 우리 기술과 철학으로 새로운 조형을 제시하는, 우리들의 조형 언어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아무도 하지 않은 낯선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던 피카소의 작업이 사실은 새 시대를 상징하는 여명이었듯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새로운 기아 EV 시리즈의 디자인이 새로운 디자인 시대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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