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차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세계 완성차 업체들이 적극적인 ‘합종연횡’ 전략을 펴고 있다. 전기차 전환기에 천문학적 비용 부담을 줄이고, 실패 위험성도 나눠 갖기 위해서다. 충전소 운영 같은 신사업 부문에선 전통의 라이벌끼리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고, ‘양다리 전략’까지 등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27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미국 포드와 독일 BMW 및 일본 혼다의 미국 법인들은 최근 북미 시장 전력망 서비스 제공을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세 브랜드는 같은 지분을 가진 합작사 ‘차지스케이프’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미국 전기차 충전소 전력 공급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통합 플랫폼(OVGIP)을 만들어 내년부터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궁극적으로는 자동차 제조사와 북미 지역 전력회사, 전기차 고객을 연결하는 전기차용 ‘스마트 전력망(그리드)’ 사업을 실행한다는 구상이다. 차지스케이프는 전기차에 쓰일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일종의 에너지 서비스 사업자다. 이 합작사는 향후 전기차 사용자들이 차량 배터리에 남는 전력을 판매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V2G(Vehicle-to-Grid)’ 사업도 추진한다. 전기차를 에너지저장장치(ESS)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토마스 뤼메나프 BMW 북미법인 엔지니어링 부사장은 “차지스케이프는 스마트 충전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고객 혜택을 늘리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했다.
초기 성장 국면에 진입한 충전 서비스 시장 공략을 위해 업체들 간에 얽히고설킨 충전 연합도 생겨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 설치된 충전기(급속+완속)는 12만8000개로 중국(176만 개)은 물론이고 한국(20만1000개)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 정부는 2021년 인프라법을 제정하면서 2030년까지 충전소 50만 개 설치를 위해 75억 달러(약 10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反)테슬라 진영이 등장했다.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의 숙적 BMW와 메르세데스벤츠가 손을 잡았고, 현대자동차 기아 제너럴모터스(GM) 혼다 스텔란티스 등이 참여해 북미에 고출력 충전소 설치를 위한 합작사 설립에 합의했다. 내년 하반기(7∼12월)부터 급속 충전소 3만 개 이상을 북미 도심과 고속도로에 설치한다는 게 목표다.
그런데 GM과 메르세데스벤츠는 비슷한 시기 테슬라의 독자적 충전 방식인 북미 충전표준(NACS)을 향후 나올 신차에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기준 미국 급속 충전기 2만8000개 중 1만2000개(43%)가 NACS 방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어떤 충전 생태계와 표준이 시장을 장악할지 몰라 헤징(위험 회피)을 하는 것”이라며 “양쪽 진영 모두 발을 담가 최악을 피하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경쟁사 간 제휴는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핵심 생존 전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럽 충전 시장에선 이미 2017년 폭스바겐그룹, BMW그룹, 다임러 AG, 포드 등 4곳이 공동으로 지분을 투자해 ‘아이오니티’를 설립했다. 이 합작사가 유럽 초고속 충전기 보급을 주도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도 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2019년 아이오니티 지분을 일부 인수하면서 공동 전선에 합류했다.
아예 전기차 개발을 함께 진행하는 업체들도 나온다. 닛산은 2월 르노와 공동 운영하고 있는 인도 첸나이 공장과 연구개발회사에 790억 엔(약 71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전기차 2종 등 총 6종의 신차를 공동 개발할 계획이다. 폭스바겐은 7월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과 중국에 중형 전기차 2종을 공동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전기차 전환은 사업 영역이 서비스업 전반으로 확장하는 대대적인 변화”라며 “불확실성이 큰 국면에 인수합병(M&A) 같은 기존 성장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전략적 제휴가 주목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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