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게임이 AAA급 게임일 수는 없습니다. AAA급 게임이란 말 자체가 본디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을 지칭하는데, 모든 게임사들이 그만큼의 투자를 할 수 있을리가 없죠.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게이머들의 취향은 천차만별이고, AAA급 게임보다 B급 게임을 더 즐겨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후류(FURYU)의 액션 RPG ‘크라이마키나’ 역시 B급 게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후류의 게임 대부분이 그래픽 포함 게임의 전반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팬조차도 선뜻 ‘좋다’라 평하진 않습니다만, 특정 취향을 핀포인트로 저격하죠. 한마디로 장단점이 (다소 지나칠 정도로) 뚜렷한 작품들을 선보여 온 것인데요. 지난 7월 27일 정식 발매된 ‘크라이마키나’도 ‘후류 게임답다’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칼리굴라 2’, ‘모나크’ 등으로 후류 게임이 입맛에 맞다고 느낀 바, ‘크라이마키나’의 출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죠. 직접 플레이해본 <첫인상>을 전달드리고자 합니다.
SF 판타지에 백합 한 스푼,
감성 충만 라노벨
‘크라이마키나’는 지구상 인류가 멸종한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가상의 먼 미래가 배경입니다. 인류사 막바지에 ‘인류 재생’을 목표로 우주로 쏘아올려진 ‘에덴’이라는 우주선이 무대이며, 자립 진화하는 기계 ‘신기’ 8기는 약 2,000년간 인류 재생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에덴을 가꿔나갔죠. 그러던 어느날 신기들을 총괄하는 제1신기 프로파토르가 갑작스레 소실되고, 정신재생을 담당하는 제8신기 에노아가 다른 4기의 신기로부터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에노아는 자신이 관리하던 수많은 인격 데이터 인격 데이터(통칭 E.V.E) 중 시도 아미, 센기쿠 미코토만을 데리고 피말리는 도피 생활을 하다 ‘모형 정원’이라는 가상 세계에 은신처를 마련합니다. 얼마 후 소실됐다던 프로파토르의 전언을 받고선 ‘선택받은 존재’라 불리는 E.V.E 레벤 디스텔을 찾아 깨우게 되는데요. 바로 이 시점부터 ‘크라이마키나’ 메인스토리가 시작되죠.
에노아 일행의 목표는 3인의 E.V.E가 에덴의 시스템으로부터 ‘진짜 인간’으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성공한다면 피를 나눈 혈연보다 더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에노아 일가’가 오붓하게 평화로운 나날을 누릴 수 있는 셈이고, 아울러 인간을 진심으로 동경하는 신기 에노아는 2,000년을 이어온 막중한 사명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죠. 플레이어는 에노아 일행의 입장에 서서 E.V.E를 조작해 전투를 수행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게 됩니다.
초반에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기계의 여정이라는 흔하디 흔한 클리셰에 미소녀 스킨만 씌운 듯한 느낌이죠.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을 목도하면서 결코 얄팍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점차적으로 서사에 빠져들게 되지요. 대강 넘어갈만한 대사, 상황 연출이라도 향후 전개에 중요한 떡밥이지 않을까하고 고찰하게끔 하는, 우수한 몰입감의 스토리입니다.
다만,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요소들이 있는데요. 우선 캐릭터들의 대사에 담긴 감성이 충만함을 넘어 넘쳐 흐를 정도라는 점입니다. JRPG식 스토리를 좋아하는 게이머도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포인트가 여럿 존재합니다. 다음은 에노아 일행의 관계성인데, 메인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백합 요소가 다소 진해지는 편이죠. 백합물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예상보단 훌륭했던,
’크라이마키나’의 전투
‘크라이마키나’는 액션 RPG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전투 콘텐츠가 풍부한 편은 아닙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스테이지의 크기는 작고 구조도 단순, 등장하는 적들의 수 역시 많아야 10기 전후입니다. 특히 초·중반까지는 메인스토리, 캐릭터 및 세계관 설정 등등을 보여주는 캐릭터간 커뮤니케이션 콘텐츠 ‘다과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텍스트 중심 스토리 게임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투 진행 방법도 덮어놓고 재밌다 말할 수준은 아닙니다. 단, 기존 후류의 게임들과 비교하면 ‘괄목상대’라 할만한 발전이 느껴지죠. 무엇보다 ‘종이인형들이 나풀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입니다. 나름의 손맛과 함께 머리 써서 공략해나가는 재미도 갖췄죠.
일반 공격 버튼을 연타로 콤보 공격을 이어가고, 적이 브레이크 상태에 빠지면 공중으로 띄웠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서 다운 상태로 만든 다음 강력한 ‘피니시 어설트’로 마무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여기에 공격 버튼을 길게 둘러 강한 일격을 가하는 차지 공격도 있고, 적의 공격을 회피 또는 카운터(패링, 반격)해야 하는 비교적 고난도 조작도 있죠. 회피나 카운터를 해야하는 타이밍이면 각각 붉은색 빛과 보라색 빛으로 미리 알려주는 친절함이 있지만, 가시성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적응하기까지 약간의 경험이 요구되긴 합니다.
초반에는 공격 버튼만 연타해도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100대를 때려도 서너대 맞고 뻗어버리는 상황이 왕왕 일어납니다. 아울러 장판 및 탄막 공격을 피해 특정 오브젝트를 파괴해야 하는 기믹 중심 스테이지도 있어 생각보다 노련한 조작 실력이 요구되는 편이죠. 한가지 다행인 점은 액션에 서툰 이들을 위한 장치가 꽤 잘 마련되어 있다는 점인데요. 스토리 감상 중심의 난이도 외에 권속기, 그리고 에노아의 지원 등 전투 시스템 자체에 탑재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우선 권속기는 E.V.E의 좌우 어깨 뒤로 둥둥 떠다니는 무기입니다. 방어형, 근거리·원거리·중거리 공격형, 범위 공격 가능 여부 등 다양한 타입이 존재하며, ‘사장’이라는 특수 능력을 장착함으로써 E.V.E와 이를 조작하는 유저의 플레이스타일에 맞게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하죠. 이어 에노아의 지원은 체력 긴급 회복, E.V.E 각성, 원거리 지원 사격, 경험치 수급량 증가를 비롯한 버프 등을 제공하는데, 보스전에서 특히 유용합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이건 좀 억지 아닌가…’ 싶은 구간도 있고, 후반부에 접어들면 E.V.E의 레벨업을 위한 이전 스테이지 반복 클리어 및 메인스토리와 관계 없는 강적 공략이 강요됩니다. 전반적으로 단점으로 꼽을만한 요소가 많은 편입니다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후류가 지금까지 선보였던 게임들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완성도를 갖췄습니다. 이 부분에 시선을 둔 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죠.
– 첫인상 –
장점은 더 예리하게, 단점은 완만하게
후류 작품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평 요소들, 매력적인 스토리와 작품별로 개성 뚜렷한 아트,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등은 ‘크라이마키나’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또, 유저가 직접 조작하는 파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게임 그래픽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많은 발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요즘 게임’ 수준이라 할 순 없지만, 특정 파트에서의 연출은 다른 게임이 실행된 것 아닐까 하는 감상이 들 정도로 우수하죠.
정리하면 ‘크라이마키나’는 절대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호평을 받을만한 게임은 아닙니다. 장점으로 꼽히는 스토리나 아트부터 취향을 크게 타는 소재, 콘셉트이며 그래픽을 비롯한 기술적인 측면에선 최신 게임치곤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도 후류의 게임에 관심 갖고 플레이해온 이들에겐 충분히 만족스럽고, 아울러 앞으로를 기대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