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차와 럭셔리 카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구매자의 취향을 얼마나 넓고 깊게 반영한 차를 만들 수 있느냐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다. 사람마다 다른 취향에 맞춰 세부 요소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대량 생산 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소량 생산에 최적화돼 있는 럭셔리 카 브랜드들은 구매자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의 요구에 꼼꼼하게 대응함으로써 가치를 지켜왔다.
특히 영국 브랜드들은 뿌리 깊은 맞춤 제작 문화와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아주 특별한 차들을 만들기로 이름나 있다. 대표적인 영국 럭셔리 카 브랜드인 벤틀리와 벤틀리의 맞춤 제작 전담 부서인 뮬리너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영국 체셔주 크루에 있는 벤틀리 본사를 방문해 뮬리너의 활동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뮬리너가 펼치고 있는 다양한 사업의 중심인 뮬리너 스튜디오를 둘러보기에 앞서 뮬리너와 벤틀리 모터스포츠의 활동을 책임지고 있는 안사르 알리 총괄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뮬리너가 “구매자와 벤틀리 브랜드의 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업이다”며 “벤틀리가 출고하는 차의 59%에 뮬리너의 손길이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뮬리너의 사업 영역은 크게 ‘큐레이티드 바이 뮬리너’, 비스포크, 코치빌트로 나뉜다. 큐레이티드 바이 뮬리너는 현재 생산되고 있는 벤틀리 차들을 바탕으로 특별한 옵션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이 중심이 된다. 뮬리너 디자인팀이 장인정신과 특별한 호화로움을 담아 꾸민 뮬리너 파생 모델들과 일반적인 선택 사항과 구분되는 ‘바이 뮬리너’ 옵션이 대표적이다.
미리 준비된 옵션을 고르는 데 그치지 않고 구매자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차를 꾸미는 비스포크 작업도 뮬리너가 맡는다. 구매자는 차체 색에서 시작해 실내의 어떤 부분에 어떤 색과 소재를 쓸 것이며, 어떻게 장식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고르고 정할 수 있다. 조합할 수 있는 옵션의 수는 무려 460억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알리 총괄은 “오랜 시간을 들여 수많은 조합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뮬리너에 이야기하면 만들어줄 것”이다며 “고객의 요구에 ‘NO’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최대한 맞추는 것이 방침이다”고 덧붙였다.
특별한 의미를 담은 소량 한정 생산 모델을 기획하고 만드는 것도 뮬리너의 몫이다. 벤틀리의 르망 24시간 경주 출전 및 우승의 역사를 기리는 특별 모델인 콘티넨털 GT 스피드 르망 컬렉션이나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인 하태임 작가와 협업해 만들기로 한 콘티넨털 GT 코리안 에디션 등이 좋은 예다. 뮬리너 스튜디오에서 휴고 치즐렛 뮬리너 디자이너와 함께 콘티넨털 GT 코리안 에디션의 디자인 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작가 고유의 표현을 한정 생산되는 열 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긴밀하게 소통하며 조율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높은 수준의 맞춤 제작을 경험할 수 있는 분야는 코치빌트다. 차의 뼈대와 차체가 분리된 구조로 만들어지던 과거에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코치빌딩을 통해 차체만 호화롭게 꾸미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일체형 차체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코치빌딩은 대부분 명맥이 끊겼는데 최근 들어 벤틀리를 포함한 극소수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가 코치빌트 모델 생산을 재개했다. 이는 공정의 많은 부분을 자동화하면서도 여전히 소량 생산과 맞춤 제작을 고려해 운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뮬리너의 코치빌트 모델로는 2002년에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왕실 전용 스테이트 리무진이 유명하다. 두 대가 제작된 스테이트 리무진은 최근 즉위한 찰스 3세 국왕이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코치빌딩 사업 강화의 첫 결실인 12대 한정 모델 바칼라,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가 팔린 것으로 알려진 18대 한정 모델 바투르 역시 디자인과 생산을 뮬리너가 맡고 있다.
맷 도티 뮬리너 모터스포츠 고객 및 세일즈 매니저의 안내로 뮬리너 스튜디오 내부를 직접 둘러보니 최근 생산을 시작한 바투르를 비롯해 한정 생산이 막바지에 이른 콘티넨털 GT 르망 컬렉션 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러 명의 뮬리너 전문 엔지니어는 차마다 서로 다른 주문 내용을 확인하며 특별히 제작된 부품들의 완벽한 조립을 위해 꼼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양산 모델을 생산하는 곳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에서 전문 엔지니어들이 작업하기 때문에 주문에서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지만 그만큼 특별한 차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한정 생산 모델을 위한 작업장 너머에는 뮬리너가 제공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클래식카 관련 작업을 전담하는 곳으로 옛 명차를 재생산하는 컨티뉴에이션 시리즈의 제작과 함께 벤틀리가 보관 및 관리하고 있는 클래식카들의 유지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컨티뉴에이션 시리즈도 다른 한정 모델들처럼 주문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차를 최신 상태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벤틀리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첫 모델은 클래식카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1920년대 경주차 4½리터 ‘블로워’다.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는 벤틀리 헤리티지 부서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뮬리너가 옛 모습 그대로 만든다. 안전에 관한 최소한의 현대화 작업만 이뤄질 뿐 엔진부터 꾸밈새에 이르기까지 옛 설계와 제작 방식을 고스란히 재현해 수제작 한다는 것이 도티 매니저의 설명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는 이번 주말에 프랑스에서 열리는 르망 클래식 경주에 출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클래식카 관련 이벤트에 선보일 예정이다.
뮬리너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사업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비자 경험과 관여를 높이는 것이 소량 생산의 중요한 가치면서 구매자와의 접점을 넓히는 방식이다”는 알리 총괄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벤틀리는 뮬리너라는 채널을 통해 한편으로는 구매자들이 원하는 남다른 가치를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과 소통하면서 브랜드와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고 있다. 나만의 특별한 차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특별한 차를 함께 만들어 나가면서 구매자와 벤틀리가 더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뮬리너의 존재 의미라 할 수 있겠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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