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이 전기자동차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한국 전기차 수출액이 세계 3위로 뛰어올랐지만 한편에선 ‘현대차 착시’가 심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계 각국이 미래 전략사업으로 키우는 전기자동차 산업에서 국내 산업 생태계의 경쟁력이 글로벌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8일 한국무역협회와 유엔 컴트레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전기차 수출액은 81억7575만 달러(약 10조8000억 원)로 집계됐다. 독일(264억5524만 달러)과 중국(200억8888만 달러)에 이은 세계 3위에 해당한다. 한국의 전기차 수출액은 2018년 11억 달러에서 4년 새 7.5배로 커졌다. 전통의 자동차 강국인 독일과 강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고속 성장 중인 중국과 겨룰 정도로 외형상 성장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반 승용 전기차를 수출하는 기업은 현대자동차그룹이 유일하다. 일부 초소형 전기차나 전기버스 등을 수출하는 중소기업들이 있지만 존재감이 미미하다.
향후 미래차 경쟁력을 좌우할 설비투자도 침체돼 있다. KDB산업은행의 설비투자계획 조사에 따르면 자동차 산업 전체 설비투자액은 올해 5조7151억 원으로 전망된다. 2015년 10조853억 원에서 8년 새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중 부품업계(자동차 차체 및 트레일러, 부품)의 국내 투자는 2015년 6조9221억 원에서 올해 2조4092억 원으로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 것으로 추산된다.
자동차 부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영세업체들은 그때그때 맞춰 납품 위주로 하고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곳이 많다”며 “전기차에 새로 들어가는 배터리, 인버터, 모터 등의 핵심 부품을 당장 만들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품업계 관계자는 “신차 중에서 전기차 비중이 10%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는 전기차에 투자해도 손익분기점이 안 맞는다”며 “그렇다고 해외 판로를 뚫기도 어려워서 결국 대규모 생산 체제가 가능할 때 가서야 뒤늦게 설비를 전환할 것 같다”고 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수출 효자 상품으로 떠오른 전기차에 대한 국내 투자를 늘릴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 1% 수준인 전기차 시설 투자 세액공제액을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동일한 수준인 30%로 높여 달라고 요구해 왔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전기차·수소차 등 미래차 생산설비 투자를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제도 개선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9일 미래차 설비를 ‘국가전략기술을 사업화하는 설비’로 지정하도록 조세특례제한법 시행규칙 개정 추진을 발표할 전망이다. 현행법에서 ‘국가전략기술을 사업화한 시설’ 목록에는 반도체, 이차전지, 백신, 디스플레이 등 4개 업종만 담겨 있다. 이들 업종은 신규 시설 투자액에 대해 대기업은 15%, 중소기업은 25%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작년 수출액 11조원 4년새 7.5배로
대부분 현대차-기아 물량 ‘원맨쇼’
작년 등록 전기승합차 수입이 42%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와 ‘아이오닉6’, 기아 ‘EV6’ 등 국산 전기자동차들은 해외 유명 매체로부터 잇달아 상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전기차 산업 생태계가 허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호황기엔 별 탈이 없더라도 위기가 닥치면 선수층이 얇은 국내 전기차 산업이 급격히 흔들릴 것이라는 의미다.
8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 업체 5곳 중 전기차를 만드는 곳은 현대차와 기아, KG모빌리티뿐이다. 그나마 KG모빌리티는 지난해 전기차 판매가 301대에 그쳤다. 한국GM과 르노코리아는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하지 않는다. 한국 전기차 산업은 현대차그룹의 ‘원맨쇼’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국내 투자 유치도 쉽지 않다. 시장 규모는 작은데 인건비는 비싸 투자 매력도가 떨어진다는 평가 때문이다. 정부에선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실판 아민 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을 만나 전기차 공장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실제 투자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중소 전기차 회사들은 초소형 승용차나 1t 트럭, 버스 등으로 틈새시장을 노리지만 이마저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국산 전기버스 업체들은 중국 기업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 전기버스들은 평균 약 2억 원대로 국산보다 1억 원가량 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버스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기 승합차’ 부문에서 지난해 외산차 신규 등록 비율은 41.9%에 달했다.
초소형 승용차는 수리 센터 부족 문제로 소비자 선호도가 높지 않다. 1000만 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에 매료돼 구매하더라도 고장이 나면 수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초소형 전기차는 농어촌의 좁은 길을 겨냥해 판매하곤 하는데 막상 중소 업체들이 수리 센터를 지방 곳곳까지 확보하지 못해 소비자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또한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 가격의 변동 폭이 큰 가운데 갑자기 이차전지 가격이 오르게 되면 중소형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것도 약점이다.
해외에서처럼 전기차 스타트업의 등장을 기대할 수도 없다. 미국에는 루시드, 리비안, 피스커 등의 전기차 스타트업이 ‘제2의 테슬라’를 꿈꾸며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니오, 샤오펑, 리오토가 대표적인 전기차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경영상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미 피스커는 첫 전기차인 ‘오션’에 교체형 배터리를 적용했고, 중국 니오는 ‘배터리 구독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등 기존 업체들과 차별화해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11년간 모빌리티 벤처업계에 종사한 한민우 직카 대표는 “규모가 큰 투자는 꺼리고, 단기간에 성과가 나는 것을 선호하는 국내 벤처캐피털의 성향상 전기차 스타트업에 과감한 투자가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자동차 컨설팅사 ‘베릴스’와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티브 뉴스’가 각각 매년 집계하는 ‘글로벌 100대 자동차 부품사’에서 지난해 양쪽 모두 이름을 올린 기업은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한온시스템, HL만도 등 4곳이다. 이외 국내 부품사들은 대부분 영업이익률이 1∼2%에 머무는 영세업체들로 투자 여력이 없다고 호소한다. 부품업계 관계자는 “실제 수익이 날 때까지 몇 년을 버텨야 하는데 완성차 업체들의 2, 3차 협력 업체들 중에서는 그 정도 체력을 가진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누적 등록 대수 42만 대인 무공해 자동차(전기차, 수소연료전기차)를 2030년까지 450만 대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국내 기업들의 투자와 성장이 더딜 경우 중국산을 비롯한 해외 업체에 시장이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재희 기자 hee@donga.com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