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독일 본사에서 귀인(貴人)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주인공은 포르쉐AG 스타일포르쉐 소속 정우성 시니어 외장(익스테리어) 디자이너. 이번에 일산 킨텍스에서 개막한 ‘2023 서울모빌리티쇼’에서 디자인 스터디 콘셉트 ‘포르쉐 비전 357’을 소개하는 발표자로 나섰다. 포르쉐 독일 본사가 디자이너 실무자를 해외에 파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한다. 포르쉐코리아도 수차례 한국인 디자이너 파견을 요청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후문이다.
이번에 방한한 정우성 디자이너가 귀인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간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포르쉐 독일 본사 외장 디자인 부서에서 일하는 순수 디자이너는 10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소수정예로 운영되는 디자인 부서이기 때문에 각자 업무가 바쁜 실무자가 해외 행사에 참석하기는 쉽지 않은 셈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포르쉐 독일 본사에서 일하는 디자인 실무자를 정식으로 만나본 기억이 없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되니 납득이 간다. 이러한 이유로 정우성 디자이너 명함에는 한글이름이나 국내용 스마트폰 번호가 없다.
포르쉐는 많은 사람들이 로망으로 여기는 브랜드다. 그런 만큼 포르쉐 현업 실무자들의 현지 생활과 업무에 대한 궁금증은 막연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외장 디자인을 담당하는 실무자. 그 실무자 중에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정우성 디자이너 말고 한국인 디자이너가 1명 더 있다고 한다. 아시아인 디자이너는 일본인도 1명 있다고 한다.
‘로망을 디자인하는 한국인’ 정우성 포르쉐 시니어 외장 디자이너를 서울모빌리티쇼 현장에서 만났다. 포르쉐 현업 디자이너의 현지 생활과 삶에 대해 물어봤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1997년 홍익대학교 자동차디자인과에 입학해 2004년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약 1년간 유학 준비를 거쳐 이듬해 독일 포르츠하임대학교 자동차디자인 과정 대학원에 진학했다. 독일에서 학업을 시작하면서 폭스바겐 디자인센터 포츠담에서 인턴을 병행했다. 인턴 시절부터 자동차 외장 디자인 업무를 맡았다. 1년이 지난 후 정우성 디자이너는 포르쉐에서 두 번째 인턴 기회를 얻었다. 꿈에 그리던 포르쉐와 첫 만남인 셈이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동안 2차례에 걸친 인턴을 마치고 마지막 1년 동안은 졸업과 취업준비를 병행했다. 2008년 포르츠하임대학교 자동차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고 동시에 첫 인턴 회사였던 폭스바겐 디자인센터 포츠담에 정규직 외장 디자이너로 합류한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폭스바겐에서 일을 하던 정 디자이너는 스카웃 제의를 받아 폭스바겐에서 포르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포르쉐 독일 본사에 한국인 직원이 합류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고 한다. 현재 정우성 디자이너는 국내 산업 디자이너들의 롤 모델로 여겨진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포르쉐 합류 직후 바로 첫 프로젝트를 맡았다. 3세대 카이엔 외장 디자인 선행개발 프로젝트에서 리드 디자이너를 담당했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각 프로젝트 리드 디자이너는 경쟁을 통해 정해진다”며 “2개 팀 10명 남짓 외장 디자이너들이 각자 디자인을 제출해 심사를 받아 최종적으로 리드 디자이너가 결정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쉬는 날이나 밥을 먹을 때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창작에 대한 압박이 일상이라고 한다. 브랜드와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끊임없는 창작이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신형 카이엔 디자인 선행개발 프로젝트 이후에는 아이코닉 스포츠카 모델인 911 카레라(992, 현행 모델) 디자인 선행개발 리드 디자이너를 맡았다. 타이칸 세단 모델 외장 디자인 선행개발도 정우성 디자이너가 이끌었다. 브랜드 첫 전기차 외장 디자인 기반을 한국인이 다진 셈이다.
정우성 디자이너가 포르쉐에서 맡은 첫 양산차 프로젝트는 911(991) 기반 고성능 모델인 ‘911 GT2 RS’ 디자인이다. 이전 세대인 997 버전 GT2 RS 단종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후속 모델로 911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을 갖췄다. 3.8리터 수평대향 6기통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이 탑재돼 최고출력 700마력의 성능을 발휘한다. 이 모델은 1000대 한정 수량 생산돼 전 세계에 판매됐다. 하지만 지난해 폭스바겐그룹 수출 차량을 싣고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모로코로 향하던 화물선이 대서양에 침몰하면서 911 GT2 RS 4대가 수장됐다. 4대가 수장됐기 때문에 포르쉐는 고객을 위해 4대를 추가로 생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우성 디자이너 ‘최애(最愛)’ 디자인은 ‘919 스트리트 콘셉트’라고 한다. 첫 양산차 프로젝트(911 GT2 RS)를 마무리하는 시기인 2016년 5월부터 919 스트리트 콘셉트 디자인을 맡았다. 919 스트리트 콘셉트는 르망 24시 대회에서 우승한 레이스카 919 하이브리드 기술력을 기반으로 일반도로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 하이퍼카로 만들어진 모델이다. 2017년 글로벌 무대에 데뷔했고 지난해 국내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 콘셉트다. 아쉽게도 양산 계획은 없다고 한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그동안 디자인한 모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디자인으로 919 스트리트 콘셉트를 꼽았다. 정 디자이너는 “일부를 제외한 차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직접 디자인한 콘셉트로 가장 정이 많이 간다”라며 “기한이 짧아 업무 강도가 높았고 가장 힘든 작업이었던 만큼 기억에도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919 스트리트 콘셉트는 짧은 보닛과 앞쪽으로 몰린 운전석, 두툼한 펜더 등 전형적인 르망 24시 전용 레이스카 실루엣을 갖췄다. 그러면서 4점식 헤드램프와 날카로운 캐릭터 라인 등 최신 디자인 요소를 더해 미래적인 느낌까지 살렸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레이스카인 ‘포르쉐 917’을 최고의 자동차 디자인으로 여겼다고 전했다. 하이퍼카로 완성된 919 스트리트 콘셉트. 그러고 보니 전체적인 실루엣이 포르쉐 917 레이스카를 오마주한 느낌이다. 정 디자이너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부터 포르쉐 917이 드림카였다”며 “운동도 잘하는데 공부까지 잘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볼륨이나 프로포션이 완벽하고 외장 컬러까지 멋지다”고 소개했다. 인상적인 다른 브랜드 차종에 대한 질문에도 마찬가지로 클래식 레이스카인 포드 GT40을 꼽았다. 포드 GT40 역시 포르쉐 917처럼 하늘색을 시그니처 컬러로 채용했고 유려한 라인과 볼륨감이 특징이다.
실제로 드림카 작업을 맡기도 했다. 2019년 3월부터 2020년 9월까지 ‘917 리빙 레전드 콘셉트’ 외장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레이스카 917의 50주년을 맞아 진행된 프로젝트다. 917 특유의 디자인 요소와 최신 디자인 요소가 조화를 이뤄 첨단 하이퍼카로 재탄생했다. 데칼은 917이 처음 우승 당시 채용한 디자인을 적용해 향수를 자극한다.
전동화 시대를 맞아 디자이너 업무의 변화에 대한 생각도 들어봤다. 의외로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다고 한다. 정 디자이너는 “패키지나 플랫폼이 달라지기 때문에 배기구 등 엔지니어링과 디자인 측면에서 마찰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신차를 디자인하는 개념이지 단순히 전기차이기 때문에 업무가 크게 달라진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며 “공기저항부분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전기차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연기관 신차를 디자인할 때도 신경 쓰는 요소이기도 하다. 전기차라서 디자인 업무상 인위적인 변화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로서 꿈에 대해서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제품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전했다. 또 포르쉐에서 더 많은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현재 참여한 디자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디자이너는 미래를 디자인하는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디자이너가 작업한 미래는 공개되는 순간 현재가 되고 현재 시점부터는 과거가 되고 이렇게 과거들이 쌓여 헤리티지가 되는 것이라는 취지다.
포르쉐처럼 헤리티지가 뚜렷한 디자인에 대해서는 스타일적인 변화가 크지 않다고 완전히 다른 디자인보다 난이도가 쉬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특유의 헤리티지를 유지하면서 변화를 만드는 과정은 새로운 디자인을 창작하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범퍼 하나를 수정할 때도 혼신의 힘을 쏟는다”며 “포르쉐는 특히 비율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그 결과로 911의 뒷바퀴 크기가 앞바퀴보다 커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포르쉐 브랜드 대표 컬러는 화이트를 꼽았다. 최근에는 화이트와 함께 레드와 블랙을 강조하는데 과거 레이스카 역시 화이트가 시그니처 컬러였다고 전했다. 본인도 하얀색 카이엔 하이브리드를 탄다고 전했다.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 한국에서 서울모빌리티쇼와 별개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디자인 토크 행사를 마련한 이유이기도 하다. 포르쉐 디자이너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자동차 디자이너의 능력보다 디자이너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해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위해서는 언어는 기본이고 토론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한국에서는 디자이너에게 토론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토론과 설득이 업무의 연속이다. 토론문화는 인지만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한 “디자이너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기본기를 길러야 한다”며 “디자인은 개인이 아닌 팀 작업이기 때문에 기본기와 함께 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성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디자이너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행동을 강조했다. 정 디자이너는 “앉아서 디자인 공부만 하지 말고 전시회나 문화 등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며 “인터넷을 활용해 짜깁기 디자인을 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결과물을 보면 훤히 보인다. 다채로운 경험이 창의적인 디자인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독일 자동차 디자인이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전시회와 행사가 많다고 전했다. 클래식카 전시나 자동차 행사가 지역을 불문하고 다양하게 열린다고 정우성 디자이너는 말했다.
해외 생활에서 힘든 점에 대해서는 음식을 꼽았다. 최근 음식 관련 방송이 다양해지면서 한국음식이 더욱 생각난다고 한다. 이번에도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자장면을 먹었다고 했다. 업무적으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창작의 고통이 가장 힘들다고 전했다. 모든 디자인 프로젝트가 경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과 삶의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성 디자이너의 표정에서 독일 생활에 대한 높은 삶의 만족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우성 디자이너는 “포르쉐는 헤리티지를 유지하면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특유의 퀄리티와 기술력을 확보한 브랜드”라며 “항상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여전히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디자이너에게는 무궁무진하고 행복한 회사”라고 말했다.
동아닷컴 김민범 기자 mb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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