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12월 타이페이의 어느날, 대만 입법원(立法院: 대만의 국회 –역주) 초미의 관심사는 지난주 대만 해협을 휘젓고 돌아다닌 중국의 군함과 항공기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설 중이던 새로운 반도체 공장이었다.
입법원 내 간소한 회의장에서 야당 의원 츄천위안(邱臣遠)은 대만반도체제조기업(TSMC)의 최근 확장 계획에 대해 우자오셰(吳釗燮) 대만 외교장관을 다그쳤다. 츄 의원은 TSMC가 미국으로부터 애리조나 피닉스에 짓고 있는 새 공장에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지 물었다. 정부가 대만에 불이익을 끼치는 ‘밀약’을 미국과 맺은 것인가?
몇 주 전부터 중국 국영매체가 대만의 집권당 민주진보당(민진당)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TSMC를 껍데기만 남기고 미국에 넘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페이스북, 유튜브, 라인, 웨이보 등지에서 음모론이 횡행했다. 중국 국영매체는 한 술 더 떠서 차이잉원 총통의 민진당이 TSMC를 미국에 보내는 행위의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온라인에서 유포되는 역정보를 추적하는 시민단체 더블싱크랩의 보고서에 따르면 11월 26일 대만 지방선거가 열릴 때쯤 이 논란은 “(중국측) 정보작전의 핵심 소재”가 됐다고 한다.
통상 대중국 강경파인 민진당은 11월 지방선거에서 수도 타이페이를 비롯한 지역의 시장직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차이 총통은 민진당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중국 매체는 계속 논란을 제기했다. 이후 츄 의원의 질의가 보여주듯 TSMC에 대한 대만 내부의 두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정말로 TSMC는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인가?
우 외교장관은 미국 정부와 그 어떠한 밀약도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터진 소식은 그의 발언을 확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2월 6일, 마크 리우 TSMC 회장은 애리조나의 신규 공장 부지 시찰을 하면서 미국 투자 금액을 세 배로 증액하겠다고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애플의 팀 쿡을 비롯한 IT 업계 최고경영자들과 함께 서서, 리우 회장은 새 공장에 4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내년에 애리조나 공장이 가동되면 보다 첨단 공정을 사용할 수 있게끔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2026년에는 TSMC의 최첨단 3나노미터 칩 생산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플랜트도 추가할 계획이었다.
반도체는 전기차부터 첨단 미사일 시스템, 최신 아이폰까지 모든 기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이다. 1950년대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가 최초로 집적회로를 상용화한 이래 기업들은 실리콘 웨이퍼에 더 많은 양의 트랜지스터를 소형화해서 담기 위해 경쟁했다. 전자기기 생산이 점차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TSMC는 1980년대에 기존 업계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칩을 생산하여 고객들과 경쟁하는 대신 하청생산 전문기업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반도체 기업이 값비싼 제조시설을 버리고 칩 설계에만 전념하는 ‘팹리스’ 제조 방식의 탄생과 맞물렸다.
인텔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국 반도체 업계 선두주자들은 자사 제조시설을 매각했고 TSMC는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칩 안에 집적시키는 기술로 세계 제일의 반도체 생산기업이 됐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판매되는 반도체 칩의 56%를 TSMC가 만든다. TSMC의 3나노미터 공정은 현재 세계 최첨단의 기술이다.
애리조나에서 리우 회장의 발표가 끝나자 바이든 대통령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러분, 미국 제조업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대만에선 미국의 이득이 대만의 손실처럼 들렸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TSMC가 USMC가 되면 대만에겐 뭐가 남습니까? 우린 뭐가 되죠?” 바이든의 공장 시찰 이튿날 대만 언론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중국공산당의 시각을 종종 반영하는 중국 국영매체 글로벌타임스에 실린 오피니언 기사도 비슷한 논조다. 츄 위원의 입법원 발언 후 대만의 최대 야당인 국민당 정치인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민진당이 미국에 “TSMC를 갖다바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인텔 같은 경쟁업체가 TSMC의 기술을 훔쳐갈 수 있으며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TSMC 직원들을 데려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TSMC는 기업가치로 아시아에서는 제일이며 세계적으로는 9위다. 4610억 달러의 시가총액은 JP모건체이스, 비자, 엑손모빌 등의 세계적인 대기업보다 훨씬 크다. 인구 2300만에 불과한 대만에게는 국가적 자존심의 원천이기도 하며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대만의 2021년 GDP의 5.7%가 TSMC에서 나오는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인 TSMC, 삼성전자, 인텔의 시가총액 변화 추이 /그래픽=더와이어차이나, PADO |
그러나 이런 자랑거리와 경제력만이 TSMC가 가진 것의 전부는 아니다. TSMC는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대만을 지키는 보루로 여겨지기도 한다. 중국은 대만을 반란을 일으킨 지역으로 간주하며 무력으로라도 신생 민주국가인 대만을 복속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결코 거둔 바 없다. 언론인 크레이그 애디슨은 자신의 2001년 저서 <실리콘 방패>에서 대만의 전자산업이 첨단 무기에 필요한 반도체 칩 공급에 핵심적이라는 점이 연합국이 대만을 보호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쓴 바 있다.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의 석유 수출량 덕분에 이라크에 대해 신속한 군사 개입이 이루어졌듯 말이다.
최근으로는 2021년에도 차이 총통이 ‘실리콘 방패’ 개념을 썼다.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권위주의 정권이 공격적인 시도로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지 못하게 대만 스스로와 다른 나라를 지켜준다”고 쓴 것이다. 국민당도 지난 12월 민진당의 반도체 산업 정책의 리스크를 설명하면서 같은 표현을 썼다. TSMC가 반도체 산업에서 갖는 위상 때문에 현지 언론은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 즉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고 부른다.
애리조나에 신설하는 공장이 중국 군함의 출몰보다 더 걱정스레 보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대만의 많은 이들이 실리콘 방패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혼란을 겪은 후 미국 정부는 ‘반도체 과학법’을 통해 국내의 반도체 산업을 부흥시키려 한다. 이 법은 527억 달러의 보조금을 투입해 반도체 관련 연구 개발, 제조 및 노동력 개발을 지원한다. TSMC 같은 기업들이 미국 내 투자를 확장할 수 있게끔 마중물을 대는 것이다. TSMC는 중국에도 반도체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워싱턴주에 자회사가 있고 일본, 싱가포르에 합작사가 있지만 애리조나 공장은 대만 밖에 있는 공장 중 가장 큰 규모다. TSMC는 또한 일본과 유럽에도 추가로 공장을 증설할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TSMC는 이제 자사의 생산 공정의 효율성 뿐만 아니라 고객과 다른 나라의 요구사항도 고려해야 합니다.” 터프츠대 교수이자 <반도체 전쟁>의 저자 크리스 밀러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TSMC는 “제조설비 규모에서도 보다 글로벌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업을 광범위하게 확장해서는 안된다는 압박도 받는다. 반도체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전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동시에 국내의 비판에도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때 고객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해줄 수 있었던 TSMC가 이제는 너무 많은 걸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장통
타이페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대만 북서부에 펼쳐진 하이테크 생태계에서 TSMC는 그 중심을 차지한다. 대만의 핵심 R&D센터인 1342헥타르 규모의 신주과학공원에는 TSMC의 본부와 대형 반도체 공장 뿐만 아니라 몇몇 대학 캠퍼스와 대만반도체연구중심(TSRI)이 있어 신입 엔지니어들이 TSMC의 첨단 노광장비를 비롯한 각종 반도체 제조 장비의 사용법을 배운다. 고속철도선이 R&D센터와 남부의 타이난시를 연결하는데 타이난에는 TSMC의 두 번째 캠퍼스와 몇몇 제조공장이 더 있다. 공장 하나하나가 수십 억 달러가 넘으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장 중 가장 값비싼 것으로 손꼽힌다.
신주와 타이난 사이에는 복합쇼핑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곳에 고속철도 역이 세워져 있고, 그 인근 공터에 351개실 규모의 기숙사가 자리잡고 있다. 친환경 건설 자재로 만들어졌으며 외벽은 태양광 패널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새로 채용된 미국 엔지니어들이 애리조나로 향하기 전 교육훈련을 받으며 머물고 있다. 10만 달러가 넘는 초봉, 주거비 보조, 그리고 3년 계약의 안정성(이 중 초기 절반은 대만에서 보낸다) 때문에 TSMC에 입사한 이들도 있지만 세계 최첨단의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일해보고 싶은 모험심으로 온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하루 12시간의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줄담배를 피우거나 지속적으로 운동을 한다.
1월의 따뜻한 저녁날이면 많은 신입 엔지니어들이 현지 선술집에서 대만인 상사들의 업무 요구량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입 중 몇몇은 벌써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도 실명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온라인에서도 비슷한 경험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익명으로 회사 리뷰를 남기는 웹사이트 글래스도어에 올라온 글을 보면 세부적인 부분까지 관여하는 조직 문화나 대만의 업무 방식에 적응하는 데 따르는 실망감에 대한 언급이 많다. 업무 환경이 이를테면 인텔 같은 회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분명 모두를 위한 곳은 아님.” 긍정적인 축에 속하는 댓글 중 하나다.
다른 미국 기업과는 달리 TSMC의 엔지니어들은 교대 근무를 하며 초과 근무도 흔하다. “TSMC가 아무런 장비 문제 없이 하루 24시간 운영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이제이아리서치 루시 첸 부사장의 말이다.
TSMC의 생태계와 기풍 속에서 자란 대만 엔지니어들은 이런 생활방식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하지만 신입 미국 직원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장 안에서는 물론이고 기숙사에서도 문화 충돌이 발생했다. 레딧과 비슷한 대만의 커뮤니티 웹사이트 PTT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 중에는 미국 엔지니어들이 “애들 같다”는 불평도 있다. 아이제이아리서치의 루시 첸은 TSMC가 일본에 새로 짓는 공장에서 일할 대만 엔지니어 채용이 애리조나 공장의 경우보다 더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그 이유 중 하나로 ‘문화적 적응성’을 들었다.
“직원은 TSMC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며 당사는 직원들이 회사와 함께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직원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TSMC는 더와이어차이나의 질의에 이렇게 답했다. “보다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해 TSMC는 다문화 커뮤니케이션 및 협력 트레이닝과 관리자 교육 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애리조나 사업은 TSMC에 단지 인사 관리상 문제만 일으키는 게 아니다. 지난 1월 TSMC는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대만에 비슷한 규모의 공장을 짓는 것보다 비용이 4~5배 더 들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노무비, 각종 허가비용, 안전 및 보건 규제와 신입 직원 교육 비용 때문이다.
(피닉스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대만 반도체 기업 TSMC의 공장 기공식에 참석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요구는 애리조나로 끝나지 않는다. TSMC는 작년 363억 달러를 자본지출에 투자했고 올해도 비슷한 금액을 쓸 전망이다. 지난 1월 TSMC는 일본에 두 번째 제조시설을 짓고 유럽에도 시설을 확장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이렇게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건 위험하다. 반도체 제조업 자체가 극도로 자본집약적인데다가 새로운 자금 지원을 받고 R&D를 유지하려면 높은 수익을 내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TSMC는 작년 마지막 분기에 47.3%의 순이익을 자랑했는데 이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 수준의 수익성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이 순이익률은 지난 10년 중 최고치였고 최근 5년간은 평균적으로 37%의 이익률을 기록했다.
“(지리적 다변화에 대한) 정부의 인센티브와 산업의 인센티브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베를린의 싱크탱크 SNV에서 기술과 지정학을 연구하는 얀페터 클라인한스의 말이다.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TSMC는 가격을 올리고 있다. 대만 국영통신사에 따르면 TSMC는 고객사에 올해 가격을 6% 인상할 것이라고 고지했다. 그러나 모두가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글로벌 반도체 매출은 침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말했다. “2023년은 TSMC에게 쉬어가는 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과잉공급의 문제는 상황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이미 상당량의 반도체가 쌓이고 있으며 최근 10년 중 가장 부진한 수요로 인해 잉여재고가 해소되는 데 4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과잉공급 상황이 발생하는 원인에는 미국의 수요 약세와 중국의 코로나19 강력 대응으로 인한 성장 둔화도 있다. 또한 특히 TV, 스마트폰, 네트워크 장비를 생산하는 제조업체들이 이미 충분한 수량의 반도체를 확보한 상태라는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생산역량의 과잉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2019년 TSMC는 12인치 실리콘 웨이퍼 1010만 장을 생산했다. 2022년에는 그 수량이 1530만 장이었다. 내년에 가동 예정인 애리조나 공장의 생산량은 반영하지도 않은 수치다.
“재고량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클라인한스의 말이다. “순전히 비상대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올바른 선택이긴 하죠. 만일 상하이에 또 락다운이 걸리거나 수에즈 운하에 선박이 걸리는 일이 생기면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이미 겪었잖습니까. 하지만 투자자들은 재고가 쌓이는 걸 반기지 않지요.”
반도체 업계가 현재 과잉공급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TSMC는 장래 반도체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고 해외 공장 투자를 정당화하고 있다. TSMC는 자사의 3나노미터 칩의 양산으로만 향후 5년 내 1조 5천억 달러의 매출 가능성을 예상한다. 업계 선두주자로서 TSMC는 전기차, 인공지능, 가상현실 기기 수요로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트렌드포스의 추산에 따르면 오픈AI의 챗GPT 서비스 하나만 상용화되더라도 그로 인한 반도체 칩 추가 수요가 3만 개가 넘을 것이며 이로 인해 업계 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 한다. (2022년 12월경 TSMC 3나노 칩 웨이퍼는 20만 달러 수준이었다 –편집자주)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가 워렌 버핏이 운영하는 보험사 버크셔해서웨이가 작년 11월 TSMC 주식 41억 달러 어치를 매입했다고 발표한 것도 어쩌면 이런 긍정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버크셔해서웨이는 작년 말 TSMC 주식 보유액을 35억 달러 줄여 총 6억1770만 달러 어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질의에 답변을 거부했으나 장기투자로 유명한 투자가로서 드문 행동이기는 했다.
TSMC가 해외 확장 비용을 고객사에 성공적으로 전가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TSMC의 기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TSMC가 해외 확장으로 인한 성장통을 감내하고 고객사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고객사에겐 해외 공장 신설이 팬데믹이나 공급망 교란, 대만 해협에서의 전쟁 등에 대한 보험이 된다. 그러나 대만 국민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실리콘 방패?
대만 입법원에서 TSMC의 대만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지 몇 주 후, TSMC는 타이난에 위치한 자사의 최신 3나노미터 제조시설에서 언론 초청 행사를 열었다. 통상적으로 매우 비밀스러운 TSMC가 이런 행사를 벌였다는 것은 마치 대만에 보내는 공개 구애처럼 여겨졌다. 완공을 의미하는 마지막 철제 빔이 제자리에 놓여지자 불꽃놀이가 시작됐고 각종 과일과 음식이 놓인 제사상 옆에서 사자춤이 펼쳐졌다.
“TSMC는 대만에 상당한 투자를 함과 동시에 기술 리더십을 지키고 있으며 주변 환경에 투자하며 함께 번영하고 있습니다.” 마크 리우 TSMC 회장이 행사장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비록 나중에는 애리조나 공장에서도 3나노미터 공정이 사용되겠지만 이날의 화려한 행사는 대만에서 가장 먼저 3나노미터 공정을 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대만의 팩트체크 네트워크 코팩츠의 공동설립자인 존슨 리앙은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패턴이라고 지적한다. 과거 사례를 보면 TSMC는 해외 확장을 할 때 처음 발표 때는 최신 기술을 강조하지만 해외 공장이 마무리돼 생산이 개시될 때쯤이면 대만 국내 공장에서 더 발달된 기술을 쓰고 있어 ‘최신 기술’이란 표현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대만에서 돌고 있는 ‘TSMC가 대만에 껍데기만 남기고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몇몇 중요한 맥락을 생략하고 있다고 리앙은 말한다. 미국에서 4나노미터 칩이 생산될 쯤에는 이미 대만에서는 (더 고도화된) 3나노미터 칩이 생산되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런 맥락 중 하나다.
현재 TSMC는 모든 최첨단 칩을 대만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TSMC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당사는 시장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대만에 투자를 지속하고 있으며 2025년부터 2나노미터 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TSMC 대변인의 말이다.
대만 정부 또한 이런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만은 미국 메릴랜드주와 델라웨어주를 합친 정도의 크기이지만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반도체산업협회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최첨단 반도체 칩 생산의 92%를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한국에서 생산된다. 전세계 반도체 칩 파운드리 업계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4%다.
/그래픽=더와이어차이나, PADO |
대만 정부는 오랫동안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왔다. TSMC도 본래 정부 지원으로 설립된 업체였다. 미국과 유럽이 자국 반도체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자 대만은 산업 지원을 더 강화하고 있다. 대만은 자국의 최첨단 제조업이 계속 국내에서 영위될 수 있도록 최근 R&D에 대한 세금 감면 조치를 통과시켰다. 차이 총통은 신년사에서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만의 핵심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산업에 대한 검토를 발표했다. TSMC 설립자 모리스 창이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에게 했다는 말마따나 미국 정부의 일회성 지출로는 반도체 업계의 신속한 발전을 따라잡기 역부족일 수 있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 업계 최강자와 가까이 있고픈 해외기업들을 유치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2월 8일,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화학물질 및 소재를 공급하는 독일의 머크 그룹은 대만 남부 도시 가오슝에서 신규 공장 기공식을 치렀다. 이는 머크 그룹의 5억 유로 짜리 대만 투자 계획의 일환이다.
이런 소식들이 TSMC와 ‘실리콘 방패’가 근시일 내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만의 민심을 어느 정도 위로하겠지만 중국에게는 대만 내 불화를 야기하고 TSMC에 대한 대만 국민들의 신뢰를 떨어뜨릴 필요성이 있다. 더블싱크 보고서의 공동저자인 제리 유는 현재 진행 중인 중국의 역정보 공작이 “대만에 껍데기만 남겨놓고 있다고 TSMC를 폄훼함과 동시에 미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반미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고 평한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개입은 결과적으로 모든 시장참여자들에게 지장을 줬다. 중국의 기술적, 군사적 부상을 막기 위해 미국은 미국 국적자의 중국 반도체 회사 취업을 금지하는 등, 중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공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TSMC는 물론이고 대만 전체가 이 ‘반도체 전쟁’의 여파를 헤쳐나가야 했다. 일각에서는 결과적으로 대만의 실리콘 방패가 ‘실리콘 자석’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귀한 반도체 제조시설들을 포획하고 반도체 패권을 쥐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향후 10년 내에 중국 정부가 대만 침략을 결정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미 공군 및 우주군의 전문 교육기관인 공군대학교의 제러드 맥키니 교수의 말이다.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될수록 앞으로 더 필사적, 그리고 공격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TSMC의 능력을 갖고 싶어하지만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할 경우 TSMC는 즉각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해진다는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물리적인 시설 파괴, 침략에 뒤따를 제재, 미국과 동맹국이 판매하는 반도체 제조 장비의 접근 차단으로 TSMC는 반도체 생산능력을 대부분 상실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중국이 어느 정도 그 생산능력을 복구시킬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종류의 무력 분쟁이건 TSMC가 그 최초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은 높다.
“만일 중국 정부가 대만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반도체를 고려한 결정이 아닌) 정치적 결정일 겁니다.” 미국 독일마샬기금의 인도태평양 사업 담당 국장 보니 글레이저의 말이다. “중국공산당에게 대만은 당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이고 그래서 상당한 경제적 비용이 들더라도 대만이 중국 본토에서 떨어져나가는 걸 막고자 할 겁니다.”
<실리콘 방패>의 저자 애디슨은 자신이 책을 썼던 2000년에 비해 대만에서 반도체 산업의 역할이 더 애매해졌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결론적으로는 대만이 반도체 산업처럼 귀하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수출산업을 갖고 있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낫다고 한다.
“만일 대만이 첨단 반도체 제조업 강국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중화인민공화국에 흡수됐을 겁니다. (실리콘 방패는 있어도) ‘파인애플 방패(파인애플은 대만의 특산품 –역주)’ 같은 건 없죠.”
TSMC에 대한 위협이 대만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야기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대만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됨으로써 장기판 위의 졸 신세를 피하고자 했다. 이제 미중 갈등이 전세계의 IT 산업을 갈라놓게 되자, 많은 대만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졌음을 깨닫고 있다.
필자 그리고어 스튜어트 헌터(Gregor Stuart Hunter)는 타이페이 주재 기자로 가디언, 닛케이 아시아, 포춘,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기사를 썼다.
– 원문: TSMC’s Turning Point (The Wire China)
– 번역: 김수빈, 편집: 김동규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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