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전기 SUV EV9의 디자인이 공개됐다. 오퍼지트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 즉, 상반된 개념의 창의적 융합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대형 SUV이다. 전기차 초반을 통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출시되는 글로벌 플레이어들은 중대형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EV9은 그 크기와 전체적인 이미지가 SUV의 나라 미국 시장을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물론 큰 차를 선호하는 한국 시장에서도 시선을 끌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 EV9의 디자인에 관한 느낌을 전한다.
글/채영석(글로벌오토뉴스 국장)
EV9의 디자인을 이끈 카림 하비브의 발언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한국’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카림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한국 문화의 선구자’가 되고자 한다. 기아 디자인 문화는 한국의 문화에 중점을 둔다. 특히 서울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문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한국 문화와 사회는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 문화, 그중에서도 서울의 문화가 미래 중심적, 선구자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항상 혁신을 꿈꾸고 있고 문화의 선구자로서 선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에 매우 많은 세계적 흐름이 한국 문화로부터 나오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한국의 다양한 문화들을 혁신적으로, 저희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전 세계로 내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에 저희 디자인 과정에도 적용을 시키려 했다. 기아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 무브먼트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특징적인 지속성이 있는 디자인을 기아차에 녹여 내고자 한다.’
현대차그룹이 출시한 모델 중에서 한국 관련 내용을 언급한 것은 제네시스 G90이 처음이었다. 2018년 초겨울 선보인 G90에 대해 현대차는 ‘강남 태생’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동원했다. 당시 제네시스 사업부를 총괄했던 맨프레드 피츠제럴드는 “제네시스는 3년 전 서울에서 탄생한 한국산 글로벌 브랜드”라고 말하며 “제네시스 강남 역시 단순한 전시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공간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공간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루크 동커볼케도 “제네시스 G90는 서울의 럭셔리 아이콘”이라며 “제네시스는 럭셔리와 혁신을 동시에 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이미지를 제품 마케팅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디자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던 피터 슈라이어는 기아부터 시작해 현대기아 디자인 총괄책임자를 맡으면서도 그런 지역적인 것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만 기아 모델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타이거 노즈를 모티브로 했다며 간접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아가 대형 전기차에 한국 문화의 선구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배경에는 ‘K’가 있다. K의 본격적인 시작은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로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싸이였다. 그보다 더 글로벌 스타인 가수 방탄소년단은 유엔에서 연설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현실을 꼬집으면서 이 시대 젊은 층들의 보편적인 고민을 한국의 가수가 세계 정치 무대를 통해 토로했다는 것은 상징성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론조사, 마케팅, 광고, 그리고 전략 전문가인 마크 펜은 최근 그의 저서 마이크로 트렌드X에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50가지의 트랜드 중 32번째로 코리안 뷰티의 예를 들었다. K-Beauty 가 미국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산 마스크팩과 립 틴트팩, 달팽이 크림 등 한국산 화장품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물광 피부가 핫 이슈라고 한다.
사실 기자는 2006년 기아가 영입했던 피터 슈라이어와 같이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굳이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글로벌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내라고 주문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주체는 시장이다. 다시 말해 소비자다.
이 시대의 한국적인 것을 만들다
그래서 카림 하비브가 말한 자연과 조화되는 대담함, 평온 속의 긴장감, 미래를 향한 혁신적 시도, 인간의 삶을 위한 기술, 이유 있는 즐거운 경험이라는 표현이 새롭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자동차회사의 디자이너들은 예술가적인 기질이 강하다. 엔지니어들과는 또 다른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다. 항상 그런 그들의 고집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다만 형상화를 제대로 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기아의 디자인은 해외 시장에서 각종 상을 받았고 현대 YF쏘나타는 기자의 부정적인 시각과는 달리 대 히트를 기록했다.
카림 하비브는 이런 모티브가 만들어진 배경을 팀 문화라고 말했다. 삶의 모든 것이 대비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융합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영감을 받으며 삶이 풍성해진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한국 문화의 선구자였다고 말한다. 흔히 한국 문화라고 하면 기와집의 처마나 한복 등을 떠 올리기 쉬운데 카림은 한국의 서울에는 모던 팝 컬쳐가 있다고 말한다. EV9을 통해 서울의 활기찬 에너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중첩되어 있으며 모던함과 전통이 매일매일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제품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 들여지는 것과는 별도로 이런 형상화는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하다. 2006년에 생각했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한국적인’ 것과는 다른 이 시대의 새로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외부인이 본 시각일 수도 있고 우리의 젊은 세대들과 어울려 창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는 ‘창조적인 도전자’가 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실패해도 괜찮은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디자인 발표회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그것을 기아만의 독창성으로 완성하는 것은 디자이너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전사적으로 뛰어야 한다. 개발과 생산, 판매, 마케팅,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이 시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 구체적으로 대응해야 가능하다.
현대차그룹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끌어냈던 기아 브랜드가 전기차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제시한 방향성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자동차라는 제품이 종합 예술품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카림의 말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세계 시장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한국과 한국 문화와 호흡하며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대 전환의 시대에 자동차 업계의 지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그 속에서 기아의 존재감을 높이는 것 외에 기아만의 세계를 개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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