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60년대에 페라리는 자동차경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스쿠데리아(페라리 경주 팀)는 결코 무한한 예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설적인 설계자 마우로 포르기에리가 나중에 말하길, 이 회사가 혁명보다는 진화에 전념했던 것은 엔지니어링 원칙만큼이나 재정적인 고려의 결과였다. 그런가하면 필 힐은 1961년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 우승 시즌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그가 기억했다 하더라도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돈보다는 명예를 위해 페라리를 운전했으니까 말이다.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인 모터스포츠에서 상업적인 후원을 얻어내기 전까지, 팀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자금을 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예를 들어, BRM을 뒷받침한 것은 루베리 오언의 산업적 능력이었다. 페라리의 경우, 주로 도로용 자동차의 판매 수익을 통해 경주를 이어갈 수 있었고, 1960년대 초 250GTE가 그 노력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1960년부터 1963년 사이에 949대의 GTE와 5대의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었다. 이는 당시 도로용 페라리 판매의 거의 70%를 차지한다.
240GTE가 페라리 최초의 2+2는 아니다. 가령 1948년 페라리가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인 투어링 차체의 166 쿠페는 작은 뒷좌석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이전의 시도들은 극히 적은 수량만 만들어졌다. GTE는 페라리가 제대로 된 양산에 들어간 첫 번째 사례이다. 아직 페라리에게는 이러한 콘셉트가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았던 때다. 이는 엔진을 앞쪽에 탑재한 V12 2+2 계보를 따라 최근의 GTC4 루쏘까지 이어졌다. 최신 페라리 로마가 이 테마를 이어가고 있지만 엔진은 트윈터보 V8로 바뀌었다.
피닌 파리나(1961년 ‘피닌파리나’라는 하나의 이름이 됨)가 디자인한 깨끗하고 우아한 차체를 입은 GTE는 생산 기간 내내 어느 정도의 혼합과 매치가 있었지만 크게 보면 3개의 시리즈를 통해 진화했다. 엔초는 GTE를 자신의 일상적인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다. GTE들은 유럽의 왕족에서부터 레이싱 드라이버 – 멕시코인 페드로와 리카르도 로드리게스 형제가 각각 한 대씩 소유했다 – 그리고 서스펜션 전문가 알렉스 몰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판매됐다.
미국 자동차 전문지 <로드 앤 트랙>은 GTE를 ‘그랜드 투어링카일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투어링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가치가 급락하면서, 이 차들 중 많은 수는 다른 ‘이국적인’ 페라리들의 복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반용 자동차로 사용되었다. 이는 전체 생산량의 2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도 최근 몇 년간 GTE는 헌신적인 추종자를 끌어 모았고 더 이상 그러한 운명을 겪을 위험은 많지 않다.
코츠월즈의 페라리 대가 밥 호튼에 모인 자동차들에게는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빵빵한 15대로 구성된 이 그룹은 이틀간 아름다운 주변 시골 관광을 앞두고 있다. 시리즈 1이 8대, 시리즈 2가 2대, 시리즈 3는 3대 등 GTE의 모든 시리즈를 포함할 뿐아니라, 외관상 유사한 4.0L 330 아메리카 2대가 동참했다. 심지어 여기에는 이전에 우리 자매지 <클래식&스포츠카>에 등장했던 차도 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시리즈 1 자동차 3 DPX는 1983년 9월호에서 애스턴 마틴 DB4와 비교시승에 사용되었던 차다. 고인이 된 마이크 매카시는 페라리가 더 실용적이고 유순한 반면 DB4는 테스트가 진행된 굿우드 서킷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각각 신형 포드 시에라 가격이면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번 모임은 페라리 차들에 둘러싸인 채 성장한 수지 필킹턴에 의해 주최되었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은 100대가 넘는 페라리를 소유했다. 그중 일부는 판매를 목적으로 구입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를 소장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250GTO(3527 GT)로, 뤼시앵 비앙치와 클로드 두부아가 1962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탔던 차다. 우승할 뻔 했지만 비앙치가 랭스에서 마지막 스테이지로 가는 도중에 우유 트럭을 들이받았다. 필킹턴은 이 차를 21년 동안 소유했다. 그전에는 250LM을, 실용적인 도로용 자동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9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이유로 단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1971년 수지의 오빠 리처드가 태어난 후 250GT SWB를 구입한 스티븐은 휴대용 침대가 뒤쪽 선반에 들어맞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수지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대학입학 전이었던 1991년 250GT SWB 캘리포니아 스파이더에서 오래된 페인트를 긁어내는 것을 도와 용돈을 벌었던 것을 기억한다. 엔진에서는 자욱한 연기가 나고 바닥은 신나게 녹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차에 대한 감상을 불러일으켰으며, 수지와 리차드에게 전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티븐의 오랜 페라리 소유 역사는 1970년에 8년 된 GTE(섀시 번호 3883GT)로 시작되었다.
공식 명칭 250 그란 투리스모 쿠페 피닌 파리나 2+2, GTE는 모터쇼가 아닌 1960년 르망 24시 코스 카로 공식 데뷔했다.
1954년 250 유로파 GT에서 처음 볼 수 있었던 티포 508 섀시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보아노와 엘레나 제작 쿠페부터 투르 드 프랑스 베를리네타까지 250GT들의 기본을 이루기도 했다. 휠베이스는 2600mm로 동일했지만 엔진은 200mm, 프론트 벌크헤드는 300mm 정도 전진해 뒷좌석이 리어 액슬보다 앞쪽에 위치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었다.
다른 티포 508 섀시들에 사용된 중앙 십자형 부분을 대신해 한 쌍의 세로형 튜브들이 추가되었지만 오버드라이브 장치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제거되어야 했다. 이 형태의 프레임은 508E로 명명되었다.
서스펜션은 앞쪽에 독립식 위시본, 뒤쪽에는 라이브 액슬, 평행한 트레일링 암과 리프 스프링이 있다. 네 바퀴 모두에 관형 댐퍼가 사용되었고, 던롭 디스크 브레이크의 서보 어시스트가 있었다. 변속기는 앞서 언급한 오버드라이브가 위에 있는 4단 올-싱크로메쉬 장치였다.
모터스포츠 기자 데니스 젠킨슨은 페라리의 초기 엔진이 V12가 아니었다면 페라리의 전설이 그렇게 강하게 자리 잡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GTE의 엔진이 그 심장이고 영혼이다. 이 전설적인 유닛의 뿌리는 1945년 여름 조아치노 콜롬보가 엔초 페라리를 위해 설계한 1.5L V12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형 2+2의 경우 2953cc 티포 128E 사양으로, 섀시와 엔진 모두 E 접미사가 붙어 GTE(때로는 GT/E)로 불리게 되었다. 베버 카뷰레터 3개가 붙은 엔진은 7000rpm에서 235마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숫자만으로는 이 차들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필킹톤 가족은 투어에 나온 GTE 중 5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수지는 우리에게 진한 빨간색 시리즈 2를 아낌없이 맡겼다. 이 차는 최근에 복원되었고, 지금은 최상의 상태다. 클래식 모터 허브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근처의 시골 도로로 향했다.
시동키를 시계 방향으로 두 번 ‘딸깍’ 움직인 다음 밀어 넣으면 콜롬보 V12에 시동이 걸린다. 차에 아주 낮게 앉는 느낌이 들었고 GTE는 빠르고 탁 트인, 유유히 흐르는 도로에서 물을 만난 듯했다. 앞뒤 무게 배분이 55:45로 250GT 피닌 파리나 쿠페의 49:51과 차이를 보인다. 연속된 좁은 코너에서 요리조리 쉽게 주행할 수 있는 차는 아니다.
하지만 지속되는 인상을 남기는 것은 엔진이다. 그것은 GTE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하게 느껴지는 직선주로에서의 가속감을 줄 뿐만 아니라, 웅장한 사운드 트랙의 반주를 곁들인다. 그 범위가 도드라진다. 낮은 회전수에서는 깊고 교양 있으며,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상당히 단단해진다. 성숙한 2+2 그란 투리스모라기보다는 경주용 베를리네타 형제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달린 길은 북쪽에 있는 전형적인 브로드웨이의 코츠월즈 마을로 가는 방향이었다. 봄날 오후 늦게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볐다.
GTE가 한 대라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이 차의 행렬은 번화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현대적인 포르쉐 911의 운전자는 자신이 받았을 관심을 우리에게 완전히 빼앗겼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투어는 계속되지만, 우리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이 소유자들은 자신의 차를 투자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운전하고 즐길 수 있는 기계로 본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 사이에는 진정한 동지애가 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간과되고 과소평가되어 온 차의 관리자들이라는 동질감의 감성일 것이다.
글·제임스 페이지(James Page)
사진·맥스 에델스톤(Max Edle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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