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한 마리 야수가 온다.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야수가 뱀처럼 휘어진 길을 따라 온다
사진 맥라렌
하코네. 하코네라는 단어를 입술에 굴리면 아스라한 고갯길이 끝없이 펼쳐지는 듯하다. 그리고 두부배달 소년 타쿠미(만화 이니셜 D의 주인공)가 AE86을 몰고 드리프트로 코너를 감아 달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오늘은 맥라렌 아투라가 주인공. 아투라의 운전석에 앉아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의 하코네 언덕을 바라본다.
아투라의 시동 버튼을 눌렀는데 새가 날아가지 않는다. 아, 잊을 뻔했다. 이 차는 하이브리드, 출발은 전기 모터로 시작된다. 우렁찬 배기음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잠든 이웃을 생각한다면 미안함을 덜어내는 일이다. 밖으로 나가 배기 사운드를 즐길 시간은 충분하다. 아투라의 EV 모드로 달릴 수 있는 주행 거리는 30km다.
맥라렌에서 하이브리드는 아투라가 처음이 아니다. 맥라렌 P1. V8 3.8L 엔진에 싱글 모터를 더해 916마력을 발휘하는 하이퍼카. P1이 구름 위의 존재라면 현실로 내려온 차가 맥라렌 GT. 오늘 만나는 아투라는 최신 트렌드에 맞춘 현실 확장판 모델인 셈이다.
멀리서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일 만큼 쾌청했던 하늘은 점점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산악지대인만큼 날씨는 변화무쌍할 터이다. 자연의 뜻대로. 시승은 도쿄 수도권 권역 내에서 드라이브 코스로 가장 유명하다는 턴파이크(Turn pike) 그리고 레이크 사이드(Lake side) 일대를 도는 총 길이 150km 구간이다. 턴파이크는 영어로 유료도로를 뜻하는데 일본에서 유료도로라고 하면 오직 이곳 하코네의 턴파이크를 지칭한다고. 그래서 실내에는 톨게이트 통행용 종이 티켓이 여러 장 준비돼 있다. 명함 크기 종이를 세로로 길게 4등분 정도 자른 모양이다.
아날로그 감성은 낮은 지붕과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이어지는 동네 풍경에서도 물씬하다. 창을 열면 어디선가 유황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나간다. 온천이 많은 지역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분위기가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경차와 박스형 차들이 주로 다니는 좁은 도로에 나타난 일군의 맥라렌 아투라들은 마치 미래에서 온 방문객 같다. 낮은 속도로 조용히 동네를 빠져나간다.
낯선 곳, 낯선 차, 통행 방식도 우리와 반대인 곳에서의 운전이지만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 편안함의 이유가 아투라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쉽게 다룰 수 있는 차는 아니다. 특히 브레이크는 분명하게 힘을 전달해야 한다. 다루기 쉬운 슈퍼카는 최신 슈퍼카 경향이지만 맥라렌의 유연함은 금세 친근해지는 인터페이스에 있다. 보닛을 감아나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 때문인지도 모른다.
편안함을 느끼는 첫 번째 요소는 시야가 좋다는 것. 운전은 궁극적으로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슈퍼카라고 해서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아투라는 지면 가까이 낮게 앉는 자세지만 어느 지상고 높은 차 못지않게 시야가 좋다. 측면과 전방은 물론 후방 시야까지 불편함이 없다. 두 번째,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차체. 회두성이 좋기 때문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좁은 골목이나 차선에 대한 부담이 적다. 그리고 직관적인 계기 조작과 운전자의 의도에 충실한 스티어링 그리고 핸들링이다.
계기 조작 방식은 맥라렌 GT와 거의 비슷하지만 EV 모드가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 변속기 벨 하우징에 탑재된 아투라의 E-모터는 기존 방사형 자속모터보다 크기는 작아도 전력 밀도는 높은 축방향 자속모터(Axial Flux E-Motor)다. 최고출력 95마력, 최대토크 22.9kg·m을 낸다. 맥라렌 P1보다 킬로당 전력 밀도가 33% 더 높은 수치다.
V6 3.0L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585마력, 최대토크 59.7kg·m의 성능. 뱅크각 120°로 무게 중심을 최대한 낮출 수 있게 배열했다. 엔진 무게는 160kg으로 V8 엔진보다 50kg 가볍다. 이는 전체적으로 아투라의 경량화에 기여한다. 총 중량 1395kg. V6 엔진에 전기 모터를 더한 시스템 출력은 680마력이다. 이를 통해 무게 대비 출력비가 동급 최고인 톤당 488마력이 나온다. 시스템 최대토크는 73.4kg·m다.
하이브리드에 최적화 된 자동 8단 변속기는 동력 전달이 짧고 빠르다. 기계식 후진 기어 대신 E-모터를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켜 후진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7.4kWh 용량 배터리는 카본 파이버 모노코크 섀시 바닥에 장착된다. 배터리 팩 무게를 다 합쳐도 무게는 130kg에 불과하다. 그리고 표준 케이블 충전 시 배터리의 80% 충전까지 2.5시간이 걸린다.
이윽고 본격적인 턴파이크에 집입한다. 앞서 달리던 차들은 어느새 각자의 길로 사라지고 액자 속 사진 같은 길이 펼쳐진다.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고 커브의 각도도 생각만큼 예리하지 않다. 운전 조작은 대부분 스티어링 휠 주변에 모여 있다. 계기판 오른쪽 상단에는 가볍게 밀어서 조정할 수 있는 있는 컴포트, 스포트, 트랙 주행 모드가 있고 왼쪽에는 댐핑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스티어링 휠 뒤의 시프트 패들 또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액셀러레이터 조작에 따른 즉각적인 스로틀 반응, 명료하게 응답하는 브레이크는 보다 적극적으로 운전에 몰입하게 만든다. 힘이 들어가는가 하면 그보다는 가뿐한 감각이다. 600마력을 훌쩍 넘는 파워가 겨우 1395kg을 몰고 가기 때문이다. 클럽스포츠 시트의 지지력,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상황에서도 집중할 수 있게 기능적이면서 무엇보다 편안하다는 데 좋은 점수를 준다. 시트 포지션 조절도 한 번에 쉽게 된다.
스포트 주행 모드, 댐퍼도 스포트에 두고 한층 더 탄력 있는 움직임과 박력 있는 배기 사운드를 즐긴다. 연이은 코너를 달리다보면 기존 GT의 코너링 방식 즉 ‘슬로 인 패스트 아웃’ 원칙이 희미해진다. 코너 진입 속도를 빠르게 가져가도 안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립 안정성과 접지력은 슈퍼카의 특성 그대로다. 직선이 길게 보이는 구간에서 풀 가속을 시도하면, 그야말로 토크가 가득 차 풍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거칠게 몰아치는 듯해도 승차감은 부드러움을 유지한다. 이 점은 분명히 맥라렌 그리고 아투라의 매력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다. 빠르게 코너를 돌아나가는 순간에서의 편안함 역시 마찬가지다. 지면과의 거리가 짧은 데서 오는 간헐적 소란스러움은 그러나 방음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이 적용된 피렐리 타이어는 확실한 효용성을 보여주고 있다.
맥라렌의 슈퍼카는 운전자가 차에 맞추는 게 아니라 운전자를 위한 차에 우선 순위를 둔다. 어렴풋했던 맥라렌의 철학을 이번 여정을 함께 하며 확인하게 되었다. 배타적이지 않은 유연성, 편안하고 직관적인 조종성 그리고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과 같은 편의성에 집중하는 모습도 이를 뒷받침한다.
맥라렌의 걸윙 도어는 어디서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무기다. 어디에서나 쏟아지는 관심어린 시선이 말해준다. 단점은? 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불어 종이 티켓이 날아갈 뻔 했다는 것. 서둘러 주머니에 넣긴 했지만 말이다. 날씨는 점점 흐려져 호수 주변 도로를 달리며 후지산을 바라볼 것이라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안개가 짙어지며 속도를 낮춰야 했지만 숲속 길을 호젓하게 달리는 기분도 괜찮았다.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길, 나트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 너머 태평양이 내려다보인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주변을 밝히는 길가 상점의 불빛들이 포근하게 낯선 방문객을 반겨주었다.
Fact file | McLAREN ARTURA
가격 2억9900만 원 크기(길이×너비×높이) 4539×2080×1193mm
휠베이스 2640mm 엔진 V6 트윈 터보 2993cc 가솔린, E-모터
최고출력 680마력/7500rpm (엔진 585마력, E-모터 95마력)
최대토크 73.4kg·m/2250~7000rpm (엔진 59.7kg·m, E-모터 22.9kg·m)
변속기 자동 8단 최고시속 330km 0→시속 100km 가속 3.0초
0→시속 200km 가속 8.3초 0→시속 300km 가속 21.5초
연비(복합) TBD 서스펜션(앞/뒤) 더블 위시본/멀티 링크
브레이크(앞/뒤) 모두 V디스크 타이어 (앞) 235/35 ZR19 (뒤) 295/35 R20
글·최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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