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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 배터리 제조사인 LG에너지솔루션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방 산업인 전기차 시장의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지속되는 데다 자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은 전 세계에서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4분기 들어서는 2200억 원 넘는 분기 적자를 내는 등 침체 분위기를 보이는 상황입니다. 업계에선 ‘설상가상’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 20일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기차 의무화 폐지 등을 공식화하며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는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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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예상했던 대로 거침 없었습니다. 취임 첫날부터 ‘미국 에너지의 해방’이라는 이름의 행정명령을 통해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시작된 전기차 의무화 폐지를 명시하고 불공정한 보조금을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2030년까지 미국에서 판매하는 모든 신차의 50%를 전기차로 생산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바이든 행정부의 행정명령을 뒤엎겠다는 겁니다. 전기차 생산이 줄면 배터리 공급도 함께 위축되면서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배터리 업체에겐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조금 폐지’를 언급한 것도 업계 불안을 키우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근거해 미국에서 만든 전기차 가운데 배터리와 핵심 광물 등에 대한 원산지 요건을 충족하면 최대 7500달러(약 1000만 원)의 구매 보조금을 세액공제 형식으로 지원합니다. 또 미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판매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첨단제조세액공제(AMPC) 혜택을 제공합니다. 배터리 셀은 ㎾h당 35달러, 모듈은 ㎾h당 10달러를 환급하는 방식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런 제도를 통해 지난해 1조 4800억 원의 세액공제 혜택을 받았는데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따라 축소 또는 폐지된다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만으로 당장 IRA를 폐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IRA를 폐기하려면 상·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LG에너지솔루션을 포함한 배터리 업체가 미국에 지은 공장들은 미시간주, 오하이오주 등에 위치하는 데 이들 지역은 트럼프 대통령 소속인 공화당의 텃밭이란 점에서 IRA 폐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공장 가동률 저하 등으로 고용에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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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너지솔루션은 수요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 능력과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습니다. 선제적인 투자로 이미 미국에서만 7개 공장을 가동하거나 건설 중입니다. 미국에서 팔 제품은 현지에서 생산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에 적극적으로 발 맞출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는 현지 전기차 1위 업체인 테슬라 등 고객사에게 공급됩니다. 최근 미국 에너지부에서 발표한 올해 전기차 구매 보조금 지급 대상인 23개 전기차 모델 중 테슬라 전기차는 9개 모델로 가장 큰 비중(39.1%)을 차지했습니다. 보조금 축소 또는 폐지 가능성은 있지만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를 탑재한 테슬라 주요 전기차들은 당분간 보조금을 지원 받게 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신차 출시 등에 힘입어 전기차 판매량이 20~30%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는데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공급도 같이 늘면서 점유율을 확대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올해 차세대 배터리로 꼽히는 4680배터리(지름 46㎜, 높이 80㎜) 공급도 본격화됩니다. 기존 2170배터리와 비교해 에너지 밀도, 용량 등 측면에서 개선을 이룬 제품으로 전기차 주행거리와 충전 성능을 높이고 원가를 절감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습니다. 빠르면 올해 1분기부터 양산을 시작해 테슬라에 공급할 예정이며 독일 메르스데스벤츠도 LG에너지솔루션의 46파이 배터리를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인공지능(AI) 산업 발전과 함께 급성장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에서도 고객사를 확보하는 등 사업 발판을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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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조명 받고 있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분야에선 상대적으로 출발이 늦은 편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한 국내 배터리 업체는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를 주력으로 개발·생산해 왔습니다.
그 사이 전 세계 LFP 배터리 시장은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낮은 에너지 밀도로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짧다는 단점으로 주목도가 낮았는데 이전보다 성능이 좋아지면서 LFP 배터리를 채택하는 전기차가 늘었습니다. 전기차에 탑재하는 LFP 배터리 비중은 2020년 17%에 불과했는데 현재는 40%를 넘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LFP 배터리는 저렴한 가격, 높은 안전성 등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값 비싼 코발트 대신 저렴한 인산철을 사용하기 때문에 배터리 제조에 투입하는 원자재 가격을 낮출 수 있습니다. 과충전, 과방전으로 인한 사고 가능성도 낮고 배터리 셀이 열화되는 현상도 적어 배터리 수명도 긴 편입니다.
이런 LFP 배터리의 인기에 중국 배터리 제조사는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렸습니다. 중국 CATL, BYD 등 업체는 일찌감치 저렴한 LFP 배터리를 앞세워 급성장했습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기준으로 이들 업체의 점유율은 53.9%로 절반을 넘겼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11.6%)은 CATL(36.8%), BYD(17.1%)에 이어 점유율 3위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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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너지솔루션은 캐즘을 겪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외 다른 분야로 발을 넓히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ESS가 대표적입니다. ESS란 말 그대로 생산된 전력 중 남은 에너지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저장하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전 세계 환경 규제로 태양광·풍력 등 재생 에너지 사용 비중이 늘면서 ESS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또 AI 산업 발전과 함께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데이터 센터가 빠르게 확산하는 것도 ESS 수요 증가에 한 몫 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 미국 내 ESS 사업 측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ESS용 배터리는 대부분 중국산 LFP 배터리를 사용하는데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장벽으로 이를 대체할 만한 제품이 필요한 상황으로 급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모든 중국산 제품에 대해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습니다.
이런 고관세를 피하려면 현지 생산 거점에 기반한 배터리 공급이 필요한 데 LG에너지솔루션은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공장을 다수 확보한 상태입니다. 기존에 전기차 배터리 생산 라인을 ESS 라인으로 전환해 수요에 맞는 적기 공급도 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의 대응 속도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당초 ESS용 LFP 배터리의 미국 생산은 2026년으로 계획했었는데 올해 상반기로 앞당기기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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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전기차 배터리입니다. ESS 배터리 공급까지는 아직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당장 충분한 전기차 배터리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전기차 캐즘은 예상보다 길어지는 데다 정책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LG에너지솔루션의 고민도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기차 의무화 폐지, 유럽 각국의 전기차 보조금 축소 및 중단, 내연기관차 파냄 금지 연기 및 완화 등 전동화 전환에 속도 조절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비상 경영’에 돌입하며 원가 경쟁력 확보와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에 주력할 방침입니다. 생산시설 확대 등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기존 생산 거점 활용도를 높여 전년 대비 20~30% 축소해 집행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프리미엄 하이니켈(High-Ni) 부터 고전압 미드니켈, LFP 등 중저가 제품까지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ESS 사업에서도 고용량 LFP 셀 등을 기반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나가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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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LG에너지솔루션의 실적은 지난해보다 개선될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LG에너지솔루션은 전년 대비 73.4% 감소한 5754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4분기만 놓고 보면 2255억 원의 영업 적자를 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분기 적자를 기록한 것은 2021년 3분기 이후 약 3년 만입니다.
삼성증권은 올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이익 전망치로 2조 2360억 원을 제시했습니다. 지난해보다 무려 288.6% 성장한 영업이익을 달성할 것이란 관측입니다. 미래에셋증권 역시 같은 기간 241.6% 증가한 1조 964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예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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