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에서 승기를 쥐기 위해서는 차별화가 필요하다. 특히 E 세그먼트는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유독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분야다. 쟁쟁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까닭이다.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와 BMW 5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두 모델은 매달 업치락뒤치락 1위 자리에 오르고 있을 정도로 E 세그먼트 최상위 포식자로 여겨지고 있다.
S90으로 E 세그먼트 전쟁에 참전한 볼보는 E-클래스와 5시리즈에 대적하기 위해 조금은 다른 전략을 짰다. 바로 높은 상품성을 갖추는 동시에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볼보는 국내 시장에 신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다양한 옵션을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볼보의 전략은 시장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출시 4년 만에 부분변경을 거친 S90 B5의 시승을 통해 볼보의 전략이 경쟁 상대를 물리칠 수 있을지 알아봤다.
볼보의 새 이정표, S80 대체하는 새 플래그십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볼보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세련된 브랜드로 인식되지 않았다. 투박하며 안전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그런 볼보는 시대의 흐름과 소비자의 인식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은 2세대 XC90이었다. 이듬해인 2016년에는 기존 S80을 대체하는 S90도 내놨다.
2016년 북미 국제 모터쇼를 통해 데뷔한 S90은 볼보 세단 최초로 ‘SPA 플랫폼’을 적용하고 새로 개발한 ‘드라이브-E’라 불리는 모듈 엔진을 탑재한 점이 특징이었다. 볼보의 드라이브-E 모듈 엔진은 가솔린과 디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모든 모델이 같은 엔진 블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브랜드 변화를 이끈 S90은 출시 4년 만에 변화를 맞았다. 그간 볼보의 신모델 투입 주기에 비해 빠른 변화다. 볼보는 친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디젤 트림을 삭제하고 가솔린 모델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더했다. 이로써 볼보는 마일드 하이브리드 모델인 B5와 B6,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로 라인업을 좁혔다.
필요한 부분만 손봐, 완성도 높인 외관
볼보는 디자인 부문에서 호평을 받은 S90의 외관을 4년 만에 다듬었다. 먼저 볼보의 상징인 ‘토르의 망치’라 불리는 T자형 주간주행등과 세로형 그릴은 그대로 유지했다. 헤리티지를 헤치지 않는 쪽으로 변화의 가닥을 잡은 것이다. 변화는 범퍼에서 두드러진다. 기존 모델의 경우 양쪽 안개등 위쪽에 위치했던 ㄷ자형을 걷어내고 범퍼를 가로지르는 두꺼운 가로 크롬 라인을 넣었다. 덕분에 안정감이 높아진 모양새다.
테일램프는 기존 모델과 형상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램프 내부 구성이 달라졌다. 또 방향지시등은 회전 방향으로 순차 점등되는 시퀀셜 타입으로 변경됐다. 이 외에도 범퍼에 머플러 팁을 없애고 뒤범퍼를 가로지르는 크롬을 덧대 전면부와 디자인 통일감을 높였다.
사실 변화의 핵심은 따로 있다. 차체 크기가 변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부분변경의 경우 안팎 디자인을 다듬고 일부 사양을 더해 상품성을 높이는 게 전부다. 하지만 볼보는 부분변경임에도 불구하고 차체 크기를 키우는 변화를 선택했다. 새로운 S90의 길이, 너비, 높이는 각각 5090밀리미터(㎜), 1890㎜, 1445㎜로 이전 대비 125㎜ 길고 10㎜ 넓고 5mm 높아졌다. 차체 크기만 보면 한 체급 위인 F 세그먼트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휠베이스 역시 2941㎜에서 3060㎜로 늘었다. 휠베이스만 놓고 보면 5시리즈보다 65㎜ 길다. E-클래스와는 무려 100㎜ 차이다. E 세그먼트는 대부분 패밀리 세단으로 이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내 공간의 넓이를 좌우하는 휠베이스가 길어진 점은 경쟁 모델 대비 확실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스웨디시 감성 가득, 넉넉한 2열 공간
실내는 여느 볼보와 같이 스웨디시 감성이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다. 부드러운 나파 가죽도 그대로며 센터페시아 중앙에 위치한 디스플레이도 여전하다. 천연 크리스탈로 제작한 오레포스(Orrefors)의 크리스탈 기어 노브는 잡는 맛이 상당하다. 또 바워스&윌킨스 사운드 시스템은 듣는 즐거움을 높인다.
그렇다고 변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운전석 12.3인치 디지털 클러스터의 구성이 완전히 변했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를 보여주는 두 개의 링으로 구성됐던 클러스터는 양쪽을 감싸는 반원 형태로 변했으며 중앙에는 내비게이션 화면도 띄울 수 있도록 구성됐다.
9인치 센터디스플레이에는 볼보가 개발한 한국형 내비게이션인 티맵이 적용됐다. 덕분에 휴대폰 연결 없이도 티맵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음성으로 기능을 조작할 수 있는데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이 꽤 좋다. 이 외에도 목적지 설정, 음악 재생 등 여러 기능을 하나의 발화어로 통합 설정 및 실행할 수 있는 개인화 루틴과 날짜와 개인 일정 등을 브리핑하는 데일리 브리핑 등의 기능도 포함됐다.
다만 경쟁 모델과 달리 무선 카플레이 및 안드로이드 오토가 적용되지 않은 점은 단점이다. 또 일부 물리 버튼을 마련했지만 사용 빈도가 높은 시트 및 실내 온도 조절이 화면 터치로만 가능해 사용 편의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터치 방식을 고수하길 원했다면 햅틱 기능을 적용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휠베이스가 길어진 덕분에 2열 공간은 매우 넉넉하다. 레그룸은 1026㎜로 성인 남성이 편안하게 앉아도 여유롭다. F 세그먼트를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심지어 1열 시트와 햇빛 가리개 등을 조절할 수 있는 버튼까지 마련해 편의성을 높였다. 욕심을 조금 부리자면 시트에 리클라이닝 기능을 더했다면 만족도는 최상일 것 같다. 가운데 좌석의 착좌감도 높은 편이다. 다만 헤드레스트가 높이 있어 운전석에서 후방 시야가 가려지는 점은 아쉽다.
말랑한 승차감, 넉넉한 출력
S90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파워트레인의 변화다. 친환경 추세에 맞춰 볼보는 기존 직렬 4기통 2.0리터(ℓ) 터보 엔진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묶었다. 사실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일반적인 하이브리드와 달리 전기모터로만 바퀴를 굴릴 수 없다. 효율성도 일반 하이브리드에 못 미친다. 대신 배터리 탑재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고 시스템 구성도 단순한 편이다.
S90을 시승하기 위해 엔진을 깨우자 꽤 큰 엔진 소음이 느껴졌다. 다만 이 소음은 외부에서만 들릴 뿐 실내로 파고들지 않는다. NVH 성능이 높은 편이라 엔진 소음, 노면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다. 엔진이 250마력을 발휘하고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14마력을 보태는 방식이라 출력에 대한 부족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속 시 터보렉이 느껴지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시승 당시 가속페달을 밟으면 지체없이 속도를 높였다. 추월 시 가속 성능도 좋은 편이었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 시간은 7.2초다.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답답할 수준도 아니다.
엔진과 조합된 8단 자동변속기는 부드럽게 변속한다. 정체 구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도 제 자리를 잘 찾아간다. 변속 충격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조향은 여유롭다. 스티어링 휠을 급하게 조작하면 반의반 박자 정도 느리게 따라온다. S90의 위치를 생각하면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S90의 움직임은 딱 패밀리 세단과 플래그십 모델에 어울린다. 서스펜션을 부드럽게 설정해 댐퍼의 움직임 반경이 꽤 넓게 느껴진다. 덕분에 노면의 충격은 쉽게 엉덩이로 전달되지 않았다. 높이가 낮은 방지턱 정도는 부드럽게 타고 넘었다. 특히 다른 모델의 경우 뒷바퀴가 요철을 넘은 후 살짝 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S90은 끝까지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동시에 불필요한 출렁임은 만들지 않았다. BMW 5시리즈 보다 확실이 승차감이 좋은 편이다.
볼보 S90은 마치 생태계 교란종 같은 느낌이다. 분명 E 세그먼트에 속해 있지만 공간은 F 세그먼트를 지향하는 느낌이다. 경쟁 모델인 5시리즈와 E-클래스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다양한 편의 기능을 갖췄음에도 7000만원이라는 가격은 선택을 이끌기 충분하다. 여기에 400만원을 보태면 300마력을 내는 최상위 모델 B6 AWD도 손에 넣을 수 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원하거나 높은 가성비를 원한다면 S90은 꽤 훌륭한 선택지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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