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투데이=이재혁 기자] 정부가 대형병원 및 수도권 쏠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상급종합병원이 외래진료를 줄이면 성과를 보상해주는 시범사업을 도입하자 병원 본연의 역할에 건강보험 재정을 들여 금전적으로 지원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5일 중증환자 진료 등 상급종합병원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올해 1월부터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해당 사업은 상급종합병원이 중증, 고난도 진료에 집중하고 중증도가 낮은 환자를 지역으로 회송하는 동시에 회송된 환자가 가까운 곳에서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도록 지역의료기관들과 진료협력체계를 구축하는 시범사업이다.
그간 꾸준히 지적된 경증외래 환자의 대형병원 쏠림으로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역량이 분산돼 중증 환자가 충분한 진료 상담을 받지 못하거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한단 취지다.
구체적으로 삼성서울병원, 인하대병원, 울산대병원 등 3개 기관이 참여기관으로 선정됐으며, 이들 병원들은 연 단위 사업을 수행한 후 성과평가 결과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된다.
이때 보상최소기준은 연도별 외래감축률이다. 1차년도 5% 감축, 2차년도 10% 감축, 3차년도 15% 감축을 충족해야 한다. 사전보상금 1800억원에 사후보상 1800억원 등 최대 36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이 같은 시범사업의 개요가 발표되자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효과가 불투명한 정책에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정부가 도입하는 시범사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중증 입원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해야 할 상급종합병원들이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의료가 공적인 규제가 없는 맹목적인 시장 경쟁에 맡겨져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에 환자 쏠림 현상을 바로잡고 중증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무한 경쟁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시범사업은 상급종병이 외래 진료를 줄이면 성과에 대해 보상해 주겠다는게 핵심”이라며 “병원 입장에서는 정부 보상과 경증환자 진료 수입 중 후자가 더 수익성이 있으면 경증환자 진료를 지속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해당 사업은 환자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며 “어렵게 대형병원을 찾은 환자가 자신을 작은 병원으로 돌려보내는 걸 과연 쉽게 수용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대형 병원 및 수도권 쏠림을 바로잡으려면 일차의료체계를 강화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일차의료 및 지역의료는 방치하고 대형병원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시범사업이 외래감축률 목표치를 달성하더라도 전체 상급종합병원의 외래환자 비율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은 1일자 입장문을 통해 “올해 기준 47개 상급종합병원 중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3개 기관만이 외래환자 비율을 5~15% 줄인다는 게 주요 목표”라며 “최대 15%를 달성하더라도 상급종합병원 전체 외래 건수의 0.9% 정도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또한 건보노조는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이 상급종합병원에 기존 제공했던 혜택에 더해 중복해서 돈을 지급하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법에 따라 정부는 중증질환에 대해 난이도 높은 의료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종합병원을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할 수 있으며,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되면 종합병원 대비 5%의 가산 수가를 적용받는다.
그런데 시범사업에 선정된 상급종합병원에 요구하는 역할의 대부분이 그대로 상급종합병원 지정 평가 기준에 담겨져 있다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전문병원을 대상으로 평가해 의료질평가지원금을 매년 7000억씩 지급하는데, 평가지표가 상급종합병원 지정 기준과 유사해 상급종합병원이 지원금 대부분을 받아간다.
결국 상급종합병원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며 ▲종별가산 ▲의료질지원금 ▲시범사업보상금 등 삼중의 혜택을 받게 되는 셈이다.
환자단체 역시 시범사업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정부가 병원의 수익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접근해 다소 아쉽다는 입장을 내비췄다.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김성주 대표는 “결국 대형병원의 매출을 보전해주겠다는 말인데 정부 당국이 고심해야 할 문제를 이익 보전의 형태로 건보 재정을 투입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며 “2차병원들에 지원이나 혜택이 돌아가 지역의료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부 당국이 해야될 역할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정책 사업들이 결국 대형 병원으로 쏠려 실질적으로 중소병원이나 환자들에게 필요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빈익빈부익부 형태가 또 반복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도 일부 위원들이 상급종합병원의 본연의 역할에 정부가 금전적 보상을 지원해 주는 것에 대해 지적했지만, 상급종합병원과 개별의료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아닌 상황에서 진료 네트워크 내 협력 체계를 구축할 방안을 모색하자는 차원에서 이 같은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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