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익 칼럼니스트 : 서울경제 기자/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부국장/돈세이돈 대표, 저서: 월저바보(월스트리트저널 바로보기)
화폐전쟁은 기축통화란 절대반지를 둘러싼 쟁탈전이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의 파운드화가 미국 달러에 반지를 내줬다.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 후 달러는 금태환의 사슬을 벗고 석유를 새로운 짝으로 맞으며 명실상부 절대권력을 획득했다. 종이와 잉크만 있으면 돈이 되는 마법이 가능해진 것이다.
문제는 지난 50년간 미국이 절대반지의 권능을 남발했다는 점이다. 찍어낸 국채가 33조 달러에 달하면서 달러도 많이 찍으면 인플레이션이란 암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됐다. 50살이 넘어 노화가 진행되는 달러 패권의 자리를 중국 위안화가 위협하고 나서면서 독수리와 팬더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달러에 대한 대안으로 탄생한 비트코인이 자산으로 인정받으며 또 다른 전선을 만들고 있다. 달러는 절대반지를 빼앗으려는 위안화와 절대반지 자체를 파괴하려는 비트코인을 상대로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조 바이든 현재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 나한드라 모디 인도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화폐전쟁을 벌이는 주역들이다.
또 다른 전장에선 일런 머스크 테슬라 CEO가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화폐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전쟁은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화폐전쟁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화폐전쟁은 새로운 경제질서와 기존 경제질서간의 총돌이다.
기존 세계경제질서란 중국이 생산공장 역할을 하고 미국이 ‘메이드 인 중국’을 소비하면서 유지돼 온 시스템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초석이 됐고, 정치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워싱턴 합의에서 집대성한 자유무역주의, 즉 세계화가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질서에서 중국은 엄청난 성장을 했다. G2 국가로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유일한 국가로 부상했다.
신세계 경제질서를 원하는 세력은 기존 경제질서가 갖는 이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고 싶어할 것이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을 소비하면서 유지돼 온 기존 경제질서는 미국의 막대한 재정-무역 적자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점에서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되면서 금태환이란 고리에서 자유로워진 달러 발행을 남발한 점도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됐다.
이런 와중에 패권에 정면도전할 수 있는 거대한 경제세력이 부상했다는 건 패권국의 입장에선 심각한 위협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란 구호 아래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를 천명했다.
조 바이든 현재 대통령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과 관련된 첨단기술의 유출을 틀어막는 방법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새로운 경제질서가 원하는 화폐는 금태환 당시 정도는 아니더라도 달러처럼 무한정 찍어내지 못하도록 일정 수준 발행이 제한돼야 한다.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생산 기지를 건설하는 것도 새 경제질서가 해결해야할 과제다.
역사적으로 중립국의 지위를 표방해온 인도가 이같은 상황을 십분 활용하면서 새 경제질서란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그 역할의 주인공이다.
국제사회는 인도를 ‘젊은 코끼리’라고 부른다, 젊다는 말은 인도가 떠오르는 경제권이란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경제활동이 가능한 젊은 연령층이 두텁다는 의미다.
인도의 중위연령(전체 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가운데 있는 사람의 연령)은 28.4세다. 중국보다 열 살이나 젊다. 영어 구사 능력이 있는 인구가 1억 명에 이르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특히 2020년 기준으로 인도의 전체 인구 중 0~14세까지는 26.16%나 된다. 또 15~64세(생산가능인구)는 67.27%이고, 65세 이상은 6.57%다. 경제 활동의 중심인 25~49세의 비중은 2010년 34.1%에서 2025년 37.3%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 이후 고금리 상황에서도 인도는 8%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도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2021년(-6.6%)을 제외하면 3.7~8.7%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인도의 GDP 비중 역시 지난해 3.5% 수준에서 오는 2027년이면 4%를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에 따르면 인도 GDP가 오는 2027년이면 독일, 일본 등을 제치고 세계 3위에 올라선다. 인도는 2023년 중국을 추월해 세계 1위 인구대국이 됐다.
S&P글로벌은 2020년대 10년간 인도의 가구당 실질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5.3%에 이를 것이고 주요 20개국(G20) 중 가장 큰 소비국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지난해 인도 시장의 신차 판매 규모는 425만 대를 넘어서며, 일본(420만 대)을 처음으로 제치고 세계 3위를 차지했다. 인도의 가구당 자동차 보유율은 2021년 기준 8.5%에 불과해 향후 자동차 보급률이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인도가 젊고 값싼 풍부한 노동력과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 구매력으로 중국을 대체할 세계공장은 물론 글로벌 기업들이 노리는 소비시장으로 급속히 부상했다.
모디 총리는 철저한 실리주의 관점에서 미국과 중국이란 거대한 플레이어들을 상대하고 있다.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누구의 적도 아닌 외줄타기 신공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모디 총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안보협의체, 즉 쿼드(Quad)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과 인도, 일본, 호주 등 4개국이 참여하는 쿼드는 사실상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려는 안보 동맹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남아시아 맹주인 인도가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나렌드라 나디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9월 글로벌 바이오연료 연합(Global Biofuels Alliance)출범식에서 에서 손은 맞잡고 있다.(사진: 모디 총리 공식홈페이지)
미국이 중국과 벌이는 반도체 전쟁에서도 인도는 사실상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선택지다. 모디 총리는 ‘인도를 글로벌 반도체 생산기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천명했다.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선택지를 찾는 미국에게 확실한 이정표를 보여준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인도의 강점은 최고급 인력이다. 인도는 자국 반도체 기업이 없다. 하지만 수많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서 인도 젊은이들이 일하고 있다.
인도는 거대한 반도체 소비국가로 성장할 잠재력도 있다. 경제발전에 따라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인도 전자반도체협회(IESA)에 따르면 2019년 210억 달러에 불과했던 인도 반도체 소비는 2025년까지 4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도 정부는 100억 달러 규모의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글로벌 반도체 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같은 신호에 글로벌 업체들이 반응하고 있다. 미국 애플의 최대 협력업체인 대만 폭스콘과 인도 에너지·철강 대기업 베단타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아메다바드에 1조5400억 루피(27조 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 등을 건설하고 있다. 두 업체는 합작 투자사를 통해 반도체 공장과 함께 디스플레이 생산 시설 등을 구축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23년 1월 31일 백악관에서 아지트 도발 인도 국가안보보좌관과 회담을 갖고 첨단 기술 및 방산·우주 개발 협력 강화 방안을 담은 ‘핵심·첨단 기술 구상(The initiative on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iCET)’에 합의했다.
양국의 iCET 협력 체제 구축은 2022년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모디 총리가 인도태평양안보협의체인 쿼드(Quad) 정상회의에서 가진 양자회담에서 약속한 후속 조치에 따른 것이다. iCET는 △국방 기술 협력 및 공동 생산 △인공지능(AI)과 양자 분야 혁신 생태계 구축 △인도에서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지원하는 형태의 공급망 다변화 △상업 우주비행 협력 △5세대(5G)와 6세대(6G) 등 차세대 통신망 구축 등을 담고 있다.
이중 가장 눈여겨볼 부문은 반도체다. 백악관은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IESA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인도의 반도체 설계, 제조 및 생태계 개발을 지원토록 했다. 일본과 첨단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기로 한 미국이 인도와도 협력을 강화해 한국과 대만에 집중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다변화하겠다는 뜻이다.
설리번 보좌관은 “인도는 반도체 패키징 및 레거시(전통) 반도체 제조 능력을 키우는 데 관심이 있다”며 인도를 적극 돕겠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항마를 키우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 기업들이 28나노미터(㎚) 수준의 중저가 구형 반도체 공정 능력을 키우도록 유도해 중국 반도체 기업들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또 다른 의도는 ‘반도체법’에 따라 해외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자국 내 생산 공장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인력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인도에서 반도체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정부는 인도의 과학·기술 인재 유치를 위해 미국의 비자 요건도 완화할 수 있도록 의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몬도 장관은 “1990년 미국의 반도체 산업 종사자는 35만 명이었지만 지금은 16만 명 정도로 줄었다”고 밝혔다. 러몬도 장관은 ‘프렌드쇼어링(우방국 간 공급망 구축)’의 주요 상대국으로 인도를 선택한 데 대해 “인도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인구도 많고 노동력과 영어 구사자도 풍부한 데다가 법치주의를 따르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미국과 인도는 또 양자 및 고성능 컴퓨팅, AI, 5G와 6G 통신 분야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인도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액(2000년 4월~2022년 6월)을 보면 △미국 556억1528만 달러 △네덜란드 423억3928만 달러 △일본 377억9333만 달러 △영국 321억8051만 달러 △아랍에미리트(UAE) 143억7151만 달러 △독일 136억8035만 달러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52억8443만 달러로 13위를 기록했다.
인도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는 2018∼2019년 620억 달러, 2019∼2020년 743억9000만 달러, 2020∼2021년 819억7000만 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인도산업협회는 자국에 대한 FDI는 2025년까지 연간 1200억~1600억 달러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인도에 대한 FDI를 주도하는 것이 미국 IT 등 첨단 기술 기업들이다. 특히 인도 정부는 특별경제구역을 지정하는 등 외국 기업들에 혜택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생산기지로 인도에 진출하고 있으며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애플을 들 수 있다. 애플은 2022년 9월부터 아이폰14 부품 일부를 인도로 들여와 조립하고 있다. 또 아이패드 제품 중 일부 생산을 중국에서 인도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아이폰 생산에서 인도의 비중은 5% 미만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미국의 JP모건은 인도가 2025년까지 전 세계 아이폰 생산의 25%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지역 4개국 안보협의체인 쿼드의 일원인 인도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 견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이 iCET 협력 체제의 일환으로 인도의 방위산업체들과 군용 제트 엔진, 장거리포, 장갑차 등 군수장비 공동생산 계획을 포함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2023년 모디 총리가 백악관을 국빈방문한 것은 미국이 중국울 견제하기 위해 인도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모디 총리는 2014년 취임 이후 미국을 다섯 차례 방문했지만, 국빈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빈 초청한 외국 정상으로는 모디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윤석열닫기윤석열기사 모아보기 대통령에 이어 세번째다.
미 국방부는 두 나라가 앞으로 군사 체계를 공동 개발하고 공동 생산하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미-인도 방어생태계(INDUS-X)를 출범시킨다고 밝혔다. 미국은 그동안 러시아의 무기에 크게 의존해왔던 인도가 이 협력 틀을 통해 대러 의존에서 벗어나는 디딤돌로 삼길 기대하고 있다.
김창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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