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말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우신 자원봉사자 최상숙(72세) 여사. 수식어가 더 따를 수 없고 형용사가 더 붙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사회에 이런 분들이 많다면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 같다.
30대의 검은 머리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여 70대 백발이 된 최상숙 할머니가 가장 즐겨 입는 고운 한복에 하얀고무신이다. 그 주인공 최상숙 여사가 40년 봉사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나 친근감 있는 우리들 부모 같은 할머니이었다. 이시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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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역촌동주민센터에서 14일 오후 자원봉사자 최상숙씨(72 여)가 40년 간의 봉사활동을 마무리하며 취약계층에게 전달할 제과제빵을 만들고 있다.
이 날은 최상숙씨가 동료 봉사자들과 함께 쿠키 및 소보로빵, 팥빵 등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만들고 있었다. 오븐기가 달구어 지고 있기에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며 모든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분주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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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노인을 돕고 경계 없는 나눔을 실천하는 선행 입소문이 나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너도 나도 동참하여 2023년 12월 연말에 훈훈한 소식을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오는 것 같았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은평구 역촌동주민센터. 현장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최상숙씨 (72세)에게 40년간의 봉사활동을 마치는 소감을 묻자 “저를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그 원동력으로 지금까지 봉사를 해온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경륜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어서 “마음의 풍요”라고 답했다. 짧은 답변이 자신만의 봉사활동에 임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했다.
30대부터 검은 머리가 소외계층과 불우한 이웃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헌신한 그녀의 머릿결은 어느새 하이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이번 나눔 행사를 끝으로 오랜 봉사활동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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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최 씨는 비인가 시설 및 인가시설에 자신이 직접 만든 제과제빵을 나눔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40년 전부터 독거어르신과 지역 취약계층의 외로움을 덜어주고자 나눔 봉사를 몸소 실천해왔다.
앞치마를 두른 최 씨는 오븐에 한차례 구운 빵을 꺼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 찬 센터 안에는 봉사자들이 다음 차례 들어갈 빵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최 씨를 비롯한 봉사자들은 반죽부터 오븐에 빵을 넣기까지 제빵에 여념이 없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힘든 내색하나 없이 묵묵하게 빵을 완성했다. 그는 포장까지 완료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최 씨에게 “언니 그동안 수고했어요”며 모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봉사자들은 그에게 “사랑해요, 언니”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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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곳 없는 어르신께 음식 대접을 시작으로… 약40년의 자원봉사로 이어져
오랫동안 봉사해 온 이들처럼 최 씨도 자원봉사의 시작은 작은 선행에서 시작됐다.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최 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최 씨는 1983년 어느 날 산책길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큰아들 내외를 위해 전 재산을 주고 상경했다는 할아버지 곁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큰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원 하나만으로 가진 재산 전부를 내줬지만, 며느리와 손주들의 재촉에 결국 집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됐다.
최 씨는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마음만은 참 따뜻한 하루를 보냈다고 기억했다. 다음 날에도 할아버지는 오갈 곳 없이 뒷동산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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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타까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최 씨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어르신들에게 국수를 삶아주기 시작했다. 최 씨의 작은 인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그 규모도 커져만 갔다.
매달 정기적으로 두 번씩 뒷동산에서 솥을 걸고 김치와 열무김치를 곁들여 어르신들에게 국수를 대접했다. 정월대보름이면 오곡밥도 지어 부모님 모시듯 정성스럽게 어르신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둘째 딸을 포대기로 업고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음식을 장만했던 최 씨에게 봉사는 삶의 원동력이자 즐거움이었고 그래서 늘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따뜻한 미소로 어르신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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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씨의 따뜻한 선행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어느덧 동네잔치로 자리 잡았다. 15명이었던 어르신들은 30명을 넘어 50명 까지 늘어났다. 어르신들에게 최 씨의 음식은 곧 공경과 사랑이었다. 늘어난 것은 어르신들만이 아니었다.
최 씨의 사연을 들은 이웃들이 자원봉사자로 그와 함께하며 어르신들의 곁을 지켰다. 예상왕래(禮尙往來)의 근본으로 거듭난 최 씨의 인심은 마을 전체를 온기로 채웠다.
최 씨의 헌신에 고마움을 느낀 어르신들은 최 씨네 대추나무에 농약을 뿌리거나 집안의 전구를 갈아주곤 했다. 서로 사랑을 나누는 계기가 됐다.
이에 대해 최 씨는 사회라는 울타리는 “아름다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둘러져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비단보다도 더 곱고 아름답다.” 시발점이 이런 훈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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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없는 천사…경계 없는 사랑 나눔 행보 펼쳐
최 씨는 손수 만든 제빵과 쿠키, 케이크를 들고 인구 50만 인구가 사는 은평구의 시설과 비인가 시설을 찾아 다니며 나눔 봉사를 실천했다. 특히 훈훈한 사연을 듣고 손수 나선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거주 독지가인 문옥섭(65세, 장원축산고기마트)씨 등에게 수 년간 지원받은 고기 100근과 생선 2박스을 들고 은평구 소외계층들에게 통 큰 선행을 이어갔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인기 폭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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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씨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큰 선행을 펼치기 위해 제과 제빵 봉사단체 금빛회를 만들었다. 금빛회 창단 당시 5명이었던 회원들은 120명까지 늘어났으며, 최 씨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10년 간을 회장 자리 봉사 한 후, 한 발 물러나 평회원으로 봉사활동을 지속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이 있다는 자체가 즐거움과 행복이었다”고 말하는 최 씨는 매달 1회 또는 2회 5시간씩 꾸준히 봉사한 결과,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만 약2,000시간 정도이다. 자원봉사센터 설립 전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특별한 행보는 암 투병 중에도 이어졌다. 최 씨는 교도소에서 출소해 갈 곳이 없는 무의탁 출소자나 정신질환 보호 관찰대상자와 보호관찰자를 보호하고 숙식을 제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에서 투병 중에도 사랑의 손길을 펼쳤다.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 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자를 비롯한 미성년자 대상 범죄자들은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대상이 된다. 전자발찌를 부착하고있는 전과자들에게 사람들은 눈길조차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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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 씨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전자발찌를 찬 보호관찰자를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직원으로 채용했다. 또 강력범죄 출소자 재활시설인 금성의 집에 입주한 출소자들을 위해 약 200평의 농지를 무상으로 수 년간 제공하고, 간식이며 초란 등 계란을 수여하기도 했다.
직접 농산물을 재배해 판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립과 갱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최 씨는 “한순간 법을 위반해 중형을 받아 보호관찰 출소자가 됐지만 이분들도 사회의 일원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국가에게 모두 떠넘길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따가운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에 최 씨는 1986년 6월에 염보현 전서울시장의 지역사회 발전 유공 기여로 표창장을 받았다. 또 2004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으로부터 자원봉사 활성화에 기여한 공적으로 표창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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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이라는 난치병에서 완전 탈출. 자원봉사활동 중단할뻔…
최 씨는 “암에서 완전히 탈출시킨 남편과 가족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최 씨가 간암에 걸리자 “남편 리기태씨가 수 많은 논문을 밤을 새며 보며 최 씨를 상대로 실험을 한 결과 간암 98.02%의 효과로 암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또 “폐암 91%, 유방암 89% 등 억제효과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 결과 최 씨의 약3cm의 간암세포주가 MRI 영상에서 완전 사라지고 채혈 AFP에서도 정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자원봉사 활동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또 “암에서 탈출을 못했다면 자원봉사를 중단할 뻔 했다”며,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광의 탈출했다”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대한민국 최고의 국립대학교 병원에 그 증거로 고스란이 남아있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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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알찬 삶, 아름다운 봉사 여정의 마침표
최 씨는 둘째 아이를 낳고 일년 뒤 유모차를 끌고 연천중학교 앞을 지나는데 삼삼오오 모인 독거어르신들을 보며 마음이 찡했다. “내가 베풀 수 있는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닭을 푹 고아 닭칼국수를 드렸는데 그 계기로 지금까지 40년 자원봉사 활동하게 됐다”며 “봉사는 제 마음을 풍요롭게 해줬다”고 회상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최 씨는 “지금 청년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계승 받아야 하는데 먹고 살기 바쁘니, 몸과 재료비까지 들어가는 봉사를 꺼려하며 봉사자 수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이렇게 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은평구청에서는 대관해주지만 약간의 재료비라도 지원이 있으면 더 많은 청년들이 봉사에 참여하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비록 나이가 많아져 육체적으로 하는 봉사활동은 멈추지만 죽기 전까지 어떤 봉사를 계속할지 생각할 것”이라며 “암이 완전히 사라져서 고운 한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편안한 여행을 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지금까지 남을 위한 자원봉사를 했다면 지금부터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자원봉사활동을 한 노고에 대하여 수고했다는 남편 리기태 씨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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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숙 약력>
□ NNH (Nature & human) 회장(1992.4.20.~현재)
□ SOCIAL DESIGNER(2004.3.1.~현재)
□ 자원봉사활동 약40년(1983.10.1.~2023.12.15.)
□ 금빛회, 어머니재단 대표(2004.6.4.~2012.10.27.)
□ 난지도시민연대(노을공원 골프장을 가족공원화 운동)(2004.8.17.~2008.11.1.)
□ 고양시3기신도시 창릉총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2019.07.01.~2021.05.31.)
□ 2012 인도국제연축제 연날리기 한국국가대표단 단장(2012.1.6.~1.31)
□ 2012 태국국제연축제 연날리기 한국국가대표단 단장(2012.3.7.~3.13.)
□ 미국령 사이판 마리아나연축제 THE MARIANAS WIND KITE FESTIVAL 심사위원(2019.2.27.~3.1.)
□ 2011~2012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 한국국가연날리기 대표단 단장(제1회2011.4, 제2회2012. 4.)
□ 서울시민 연날리기대회 서울특별시장 대상 심사위원 (제1회~12회, 4회 제외)
□ 한국-카타르 수교 40주년 기념 연날리기행사단 부단장(2014.04.18.)
* 작품 전시.
□ 제1회 이순신 장군 신호연 및 현대작가 50인의 전통연 전시회(세종문화회관)(2000. 9.)
□ 한국 전통연 33작품 전시회(전통문화체험공간 삼청각(三淸閣)(2002. 2.)
□ 제2회 서울시 전통문화대전 전시회(세종문화회관)(2004. 4.)
□ 아시아나항공 주최 한국 전통 민속연 전시회(김포공항)(2005. 2.)
□ 제3회 서울특별시 전통문화대전 전시회(서울역사박물관)(2009. 10.)
□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전시회(마리나베이 야외 전시장)(2012. 9.)
□ 대한민국-카타르 수교 40주년 기념 이슬람 박물관 전시회(카타르 도하 야외 전시장)(2014. 4.)
□ 이집트 K-Craft on the the Nile river(K-크래프트 온 더 나일강) 전시회(카이로 사키아 문화센터)(2017. 11.)
* 수상
□ 서울특별시장 표창(상장)(지역사회 발전 유공 1986.6.30.)
□ 서울특별시장 표창(상장)(자원봉사활성화에 기여한 유공 2004.12.31.)
□ 2018중국 베이징국제연축제(6th Beijing International Kite Festival, Invitational Tournament and Beijing-Tianjin-Hebei Kite Exchange 2018) 리기태, 최상숙 대상(大賞) 공동 챔피언 획득(201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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