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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우리 시대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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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예술의 황금기인 1844년에 출생한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인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은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니콜라이 고골’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의 초상화를 그린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일리야 레핀, (1844~1930)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 (1844~1930)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1800~1900년대 러시아는 러시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각 분야에 걸쳐 두루 배출되던 시기였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작곡한 ‘라흐마니노프’,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 음악을 작곡한 ‘차이콥스키’ 같은 거장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 일리아 레핀은 ’혁명‘을 테마로 러시아 민중들의 억압받는 삶을 사실주의 화풍에 담아낸 일련의 명작들을 발표합니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 당시 봉기가 잦았던 볼가강 지역 인부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과, 농노제와 차르 군주제의 폐습을 묘사한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태동하기까지의 격렬했던 민중 세력의 투쟁을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예술적 삶의 한 축은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레핀의 작품에는 민중을 위한 비장함이 담겨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은 「문호 톨스토이를 비롯한 동시대의 예술가들과의 교류」였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도 아주 친했던 그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는 동참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의 선전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술과 정치」, 그것에 대한 인간마다의 각기 다른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입니다. 

레핀의 작품에는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이 풍부하게 담겨있으며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거침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풍부한 감성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은 그의 사실주의 회화를 완성 시킨 원천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예술가로서의 의식은 단순히 ‘낭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그의 초미(焦眉)의 관심사는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의 짓밟힌 삶이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그의 예술적 노력은 그의 대표작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 작품 / 160.5x167.5cm,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 작품 / 160.5×167.5cm,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당시 아무리 러시아 사회가 폐쇄적 군주제였어도 근접해있는 유럽 국가들의 새로운 학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러시아 사회와 민중들을 구출할 학문을 배우려고 유학을 떠나거나, 투쟁 세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혁명가들을 가장(家長)으로 둔 가족들의 삶은 매우 고난스러웠습니다.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작품은 이렇듯 이제 막 유배지에서 돌아온 혁명가인 가장을 가족들이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국가, 그 전조를 드리우던 시대의 암울함과 혼란스러움이 이 그림이 묘사한 가족들의 표정 속에 진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부분적으로 확대해서 보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느껴집니다.

먼저, 그림 속 혁명가는 오랜 기간 유배지에서 억압과 고통 속에 지내다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타오르는 신념을 눈빛에 담은 채 집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는 가족들의 표정은 각자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는 문을 열어주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아내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합니다.

​또한 혁명가와 마주한 검은 옷의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그에게 막 다가서려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일 것입니다. 정치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모정은 본능입니다. 여인의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미세한 떨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 표정에는 재회의 반가움이 무엇보다 크게 스치고 지나갑니다. 단지 막내로 보이는 하얀 옷의 어린 소녀만이 기억을 되살려 앞의 「낯선 이」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이런 표정이 모여 이룬 하모니(Harmony)는 마침내 「한 가정의 표정」을 넘어 19세기 말 「러시아의 표정」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일리야 레핀이 환생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적 표정을 캔버스(Canvas)에 담는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그 표정이 자못 궁금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천신만고 끝에 현 정부가 새로이 집권했지만 행정부의 최고 사령탑인 대통령실은 문화 수석 비서관실이 오래전에 폐지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 정책에서 문화예술은 뒷전에 두겠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예컨대 정부는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화예술진흥 정책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화융성 정책 등 창조적 예술정책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원금 몇 푼씩 던져주고 얻어야 할 표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계를 계륵(鷄肋)정도로 여기는 「이 시대 정치인들과 정부 관료들의 표정」같아 쓸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 예술가들은 마치 동냥을 구하듯 정부가 던져줄 지원금만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 또한 「우리 시대 예술인들의 표정」입니다. 한마디로 무표정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혁명가는 단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무도 (혁명가를)기다리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이 왜 이래?”하는 한탄 조의 유행가 자락만 귓가에 간간이 스쳐 갈 뿐입니다.

1930년 9월 29일, 일리야 레핀은 86세를 일기로 핀란드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현재 레핀 기념관인 ’페나테스(penates)‘ 뒤뜰에 누워 지금도 변함없이 러시아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혁명적 예술가 한 사람쯤 기대해보는 것이 허황된 꿈일까요?

오늘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노래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리스의 한 청년 레지스탕스(Resistance)와 그의 연인은 지중해 연안의 ‘카테리니(Katerini)‘에 가서 사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카테리니를 향해 떠나기로 약속한 11월 어느 날,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약속 장소인 기차역에 남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차가 출발할 8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여인은 처절한 심정으로 혼자 기차에 오릅니다. 그때 기차가 떠나가는 뒤편에 숨어 이 광경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의 애인인 레지스탕스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재 정부와의 투쟁의 길이었습니다. 억압받는 국민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그리스의 혁명 투사이자 작곡가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독재 정부에 저항하여 싸우던 한 청년 레지스탕스와 그의 애인이 겪은 이별의 아픔을 그린 작품으로 깊은 애수(哀愁)가 어려있는 노래이며 그리스인들이 늘 애잔하게 읊었던 「저항의 노래」입니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1925~2021)​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1925~2021)​

그리스의 위대한 국민 작곡가로서 “그리스 음악의 대사”라는 호칭을 받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1천여 곡에 이르는 민중 가곡을 작곡한 외에도 7곡의 교향곡, 2곡의 발레곡, 2곡의 오라토리오, 4곡의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영화음악의 귀재(鬼才)로서 ’안소니 퀸‘ 주연의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 ‘안소니 파킨스’ 주연의 <죽어도 좋아(Phaedra)>, ’멜리나 머큐리‘ 주연의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등 수많은 유명 영화의 음악을 맡기도 했습니다. 

1967년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를 비롯해 그의 모든 음악 작품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부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음반을 듣는 것조차 일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군사재판에 의해 투옥되자 세계적 음악의 거장인 ‘쇼스타코비치’, ‘번스타인’, ’벨라폰테’ 등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에 의해 1970년 석방되어 파리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는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성악가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의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라는 그의 음반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SBS 방송 드라마였던 <백야(白夜)>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고 이어서 우리말로 번안한 가사로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므로 더욱 유명해진 곡이기도 합니다.

이제 들으실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라는 가곡은 사실 그들의 민족적 정서와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는 음악 외적(外的)인 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곡이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우리 가곡들의 우수성을 따르지는 못할 듯합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먼저 우리말 번안곡을 한국의 세계적인 성악가인 소프라노 조수미의 노래로,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의 세계적인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의 원곡으로 듣고자 합니다. ​이 두 성악가의 노래를 비교해 들으신다면 아마도 우리의 성악가 조수미의 진가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Mikis Theodorakis, ‘To Treno Fevgi Stis Okto’ Sop. Sumi Jo & M. Sop. Agnes Baltsa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 애달픈 노래가 혹, 「문화예술」이 「물질문명」에 짖밟힌 채 암울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표정]은 아닐런지요?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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