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작뉴스 심현주 기자] 도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 김형숙 순천향대 간호학과 교수를 만났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곧 병원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병원에서의 죽음은 대부분 ‘나’의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존중받지 못한다. 품위 있는 죽음, 웰엔딩에 대한 김형숙 교수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았다.
중환자실 간호사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출간했다. 그 후 어떤 점이 달라졌나.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힘들 때마다 일기를 썼다. 중환자실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내가 죽을 때는 저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적었고, 그 글을 엮어 출간했다.
사실은 책이 많이 읽히길 바라지는 않았다. 의료인 입장에서는 알려지기 꺼릴만한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걱정도 되고, 겁도 났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많이 했다며 간호사, 의사 심지어 보호자도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지.
대부분의 환자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입실한다. 중환자실 입실은 감옥에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하다.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감옥처럼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넘긴다.
그리고 당사자에게 치료 과정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지만, 의사 결정권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사자가 배제된 채 갑자기 죽음을 맞는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중환자실 환자 중, 일가친척 없이 홀로 남매를 기르던 중년 남성이 있었다. 면회를 오던 동생들도 알고 보니 친동생이 아니었다. 워낙 인품이 좋았던 사람이었기에, 교회 동생들이 면회를 자주 왔고 의료진도 그들을 환자의 친동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리 심장 이식 수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도 아니었다. 환자는 이뇨제 등의 처방으로 상태가 괜찮아지면 퇴원했다가 다시 단골처럼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마지막 입원 때는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당사자에게 죽음이 다다랐다는 정보를 알릴 생각조차 못 했다.
숨이 찬 상태가 지속되면서, 환자가 힘들어하는 나날이 지속됐다. 환자를 위한답시고 기도 삽관을 강권했다. 환자는 계속 괜찮다고 참았지만, 산소 포화도가 더 떨어지면 심정지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심정지가 예상되는 상황은 응급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이 기도 삽관을 진행했다. 기도 삽관을 하려면 똑바로 누워서 고개를 약 90도가량 젖혀야 한다. 그런데 기도삽관 직전에 환자가 잠깐 할 얘기가 있다는 느낌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 일단 빨리 기도 삽관을 하는 게 안전하니까, 나중에 기도 삽관하고 나서 말할 기회를 주겠다고 손을 묶고서 기도 삽관을 했다.
기도삽관 후에는 종이 같은 걸 갖다줘도 소용이 없다. 환자가 다급하게 뭔가를 써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환자는 침대 난간을 두드리면서 뭔가 할 얘기가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침대 시트 위에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쓰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심정지가 오면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지 의료진이 가족에게 확인해야 하는 단계가 왔다. 그때, 환자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환자의 상황을 듣게 됐다. 환자가 홀로 중학생, 고등학생인 남매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며, 면회 오던 사람들이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회복 가능성이 없다면 남겨진 아이들 교육이라도 시켜야 하니, 인공호흡기로 오래 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제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생각이 났다. 환자는 기도삽관으로 뒤로 넘어뜨려지는 순간에 죽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계속해서 뭔가를 썼던 것이, 어쩌면 아이들에게 전할 그의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환자가 사망하기 전까지 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공호흡기를 다는 순간부터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환자실 환자나 보호자 심지어 의료진도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
요즘,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의 측면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많이들 작성한다.
캠페인도 많이 진행되고, 개인적으로는 가끔 관련 강의도 한다. 강의하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 대부분 사람이 잘못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안락사와 달리, ‘연명의료 중단’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안 살린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현재의 과학적인 기술이나 의료진의 판단으로, 환자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명확한 판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못 살리는 환자를 대상으로 ‘자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건지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Allow Natural Death’라고, ‘자연적인 죽음을 허용한다’는 표현을 쓴다. 자연적인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 연명의료 중단의 의미인데, 살릴 수 있는 상황인데 의료행위를 포기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가족과 사전에 협의가 되어있어야 한다. 환자는 연명의료 중단을 원했지만, 보호자가 연명의료를 희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환자가 의식을 잃은 경우에는 보호자의 의견을 따라 연명의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의료기관 윤리위원회가 설치된 병원에 가야 한다. 의료기관 윤리위원회에서 연명의료 결정을 거친 다음에,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위해, 어떤 뒷받침이 필요하나.
먼저, 호스피스 병동의 숫자가 늘어야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주치의나 가족들이 환자 상태를 자연스러운 임종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연명 의료 결정 여부 자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동 외에도, 가정 호스피스가 가능해져야 한다. 고령자의 경우, 꼭 의료적 처치 때문이라기보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입원하는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 돌봄이나 지역사회 통합돌봄과 결합해서 가정 호스피스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 호스피스가 가능해지려면, 무엇보다 24시간 긴급 의료상담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것이다. 전화로라도 고통스러운 증상에 대해 의료적 처치를 문의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동네 주치의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4시간 상담만으로는 가정 호스피스가 불가능하다. 일반인은 임종 증상과 아닌 증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119를 불러서 이송하다 보면 인공호흡기를 쓰게 되고 인공호흡기 해놓은 것을 떼려면 문제가 또 복잡해진다. 환자와 보호자가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의료진이 지속적으로 지켜보면서 임종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예기치 못한 상태에 대해 상담하고 안내해 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모든 자연사 과정에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따라서, 호스피스를 확대하는 방식보다, 다양하고 적절한 정책을 펼치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의료진이 증상 관리는 할 수 있도록 해주되, 임종 케어 역량을 의대와 간호대에서 기본적으로 갖출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를 집에서 적절히 증상 관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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