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항저우. 이곳엔 신비롭고 유서 깊은 서호가 있다. 고요하고 수려한 자연과 전통 건축물이 그림처럼 펼쳐진 서호는 예부터 중국의 수많은 문호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2011년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이처럼 고고한 중국의 옛 풍경과 프랑스의 모던 여성을 상징하는 샤넬과의 접점은 무엇일까? 힌트는 가브리엘 샤넬이 살던 파리 깡봉가 아파트에 놓인 병풍. 그녀는 중국 옻칠 예술품이자 고풍스러운 코로만델 병풍을 늘 곁에 두었다. “중국 미술품 상점에서 코로만델 병풍을 발견하면 기뻐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말할 만큼 코로만델 병풍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리하여 샤넬 여사는 평생에 걸쳐 17~19세기에 제작된, 20여 점에 달하는 코로만델 병풍을 수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는 항저우의 서호를 배경으로 과거 중국의 일상을 표현한 병풍을 아꼈다. 그녀의 병풍 컬렉션 중 가장 사이즈가 큰 이 병풍은 개인 서재에 벽처럼 놓였다. 샤넬 여사는 매일 이 병풍 속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1950~1960년대의 샤넬 컬렉션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피스들이 등장했다. 그녀는 병풍 속 호수를 교류와 교감의 배경으로 삼아 다양한 상상력을 펼쳤다. 살아생전 한 번도 중국을 가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병풍 속 이미지와 상상으로 소통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것이다. 2024/2025 공방 컬렉션은 바로 그 서사에서 출발해 실제로 항저우 서호에서 완성됐다.
Journey of Creation
이번 공방 컬렉션의 시작을 알린 건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한 공방 쇼 필름. 샤넬 앰배서더 틸다 스윈턴을 필두로 또 다른 앰배서더인 신지뢰와 레아 도우가 출연하는 이 필름은 ‘서호’라는 특정 장소와 샤넬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의 특별한 인연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샤넬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며 코로만델 병풍을 관찰했다. 병풍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왠지 초기 영화 스크린이나 작은 이야기들이 잔뜩 등장하는 거대한 만화 같았다. 어디를 봐도 또 다른 일상의 모습이 펼쳐졌다. 내 모든 작품에서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은 장소다. 대부분 내가 발견하고 사랑하게 된 특정 장소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찾으려는 열망에서 시작됐다. 그 이야기는 그곳에 속한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여야 했다.”
필름에 대한 빔 벤더스의 코멘트처럼 영상은 파리 깡봉가의 아파트, 특히 그곳의 서호 코로만델 병풍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틸다 스윈턴이 응시하던 병풍 속 호수 표면에 물결이 일렁이고, 수많은 운하와 다리, 탑과 가까운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당시 서호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이렇게 틸다 스윈턴은 현재의 가브리엘 샤넬이 돼 병풍 속 서호와 교감하고, 결국 서호로 떠났다.
이 병풍은 노트북 화면이나 카메라에 찍힌 사진 등으로 전환되며 세계로 향하는 새로운 창이 됐다. 영상은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교감과 열린 마음,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처럼 과거의 꿈과 현대의 습관이 결합하는 모습은 전통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도시 항저우의 웅장함을 상기시켰다.
Dream to Reality
2024년 12월 3일, 어둠이 내려앉은 서호의 밤. 호수의 신비로운 절경을 배경으로 샤넬의 2024/2025 공방 컬렉션이 공개됐다. 컬렉션의 영감이 된 가브리엘 샤넬의 코로만델 병풍, 병풍 속에 있는 실제 장소에서 런웨이가 열린 것이다. 런웨이는 호수를 가로질러 길게 이어졌다. 모델이 나올 때마다 잔잔한 호수에 같은 잔상이 남아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매혹과 여행, 꿈을 주제로 펼쳐진 이번 컬렉션은 독창적이고 정교했다. 작은 플라워 장식을 수놓은 롱 코트, 점프수트와 수트를 레이어드한 룩, 코로만델 병풍의 패턴을 전면에 장식한 재킷과 스커트, 호수의 오묘한 푸른빛을 닮은 워시드 데님,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트위드 세트업, 화려한 금박 드레스, 우아한 플리츠스커트, 깃털을 장식한 벨벳 패딩 재킷, 플로럴 모티프를 수놓은 드레스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특히 여러 질감의 롱 코트(가운데 슬릿이 깊은 롱 드레스 같은)가 돋보였다. 트위드와 새틴, 벨벳 등 고급스럽고 우아한 소재가 주를 이뤘다.
코로만델 병풍 모티프의 점프수트 위에 트위드 크롭트 재킷과 미니스커트를 레이어드한 룩 역시 흥미로웠다. 그 밖에도 공방 팔로마에서 만든 프로깅을 장식한 오버사이즈 재킷, 자개 장식을 연상시키는 플라워 자수 카디건, 공방 르마리에와 로뇽이 제작한 아름다운 플리츠와 플라운스 피스, 골드 레이스 소재 롱 드레스 등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액세서리 중에선 가벼운 여행 짐을 쌀 수 있을 것 같은 큼지막한 퀼팅 토트백과 베개처럼 포근해 보이는 새틴 소재의 퀼팅 핸드백, 반짝이는 별 모양의 클러치백 등이 눈길을 끌었다. 공방 마사로에서 제작한 미드 카프 부츠, 여기에 르사주의 자수 장식을 더한 피스와 구센의 메달리온과 커프, 메종 미셸에서 만든 모자와 풀라, 비니와 스카프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le19M Spirit
공방 컬렉션은 샤넬 컬렉션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인들의 노하우를 기념하고 le19M에 입주한 공방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벤트다. 이런 의미에서 공방 컬렉션의 진정한 주인공은 샤넬의 파트너이자 정교한 기술력의 총체인 일곱 개의 공방이라 할 수 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르사주는 1983년 샤넬과 처음 인연을 맺었고, 2002년에 패션 공방에 합류했다. 이번 공방 컬렉션에서 르사주는 가브리엘 샤넬이 사랑했던 코로만델 병풍 모티프를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의 자수로 재해석했다. 또 르사주의 텍스타일 디자인 부서에서 개발한 트위드는 코로만델 병풍의 풍부한 색감과 옻칠의 반짝임을 연상시키며 이번 공방 컬렉션의 핵심 무드를 잘 표현했다.
le19M의 구두 공방인 마사로와 함께 아름다운 부츠도 디자인했다. 비즈와 스팽글을 활용해 산수화를 표현한 미드 카프 부츠가 바로 그것. 또 다른 자수 공방인 몽텍스는 1949년 파리에서 설립된 이래로 새로운 소재와 질감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번 공방 컬렉션을 위해 꽃으로 수놓은 브레이드 장식을 제작했다.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는 인광실을 활용하고, 핸드페인팅 기법으로 음영 효과를 줘 해 질 녘에 진행된 런웨이 쇼에 생동감을 더했다. 깃털과 플라워 장식이 장기인 르마리에는 샤넬 크리에이션 스튜디오와 함께 깃털을 장식한 파스텔컬러 재킷을 만들었다. 제이드 그린 실크 소재에 다이아몬드 퀼팅 패턴과 플리츠를 넣고, 튤과 마라부 깃털로 장식한 재킷과 라이트 블루 벨벳을 퀼팅 처리한 다음, 퀼팅이 만나는 부분에 엠보싱과 아플리케 기법을 적용한 벨벳 플라워를 장식한 재킷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중국의 뉘앙스를 세련되고 정교하게 표현한 이 피스들은 컬렉션에 동양적인 무드와 포근한 색감을 더하며 이번 공방 컬렉션을 한층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2013년부터 르마리에에 합류한 로뇽의 장인들도 뛰어난 플리츠 기법으로 컬렉션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들의 합작 피스는 이번 공방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뇽이 플리츠를 넣고 르마리에에서 스모킹과 비드 작업을 한 오프화이트 실크 새틴 재킷이 그중 하나다. 이 재킷을 자세히 보면 폭과 방향이 다른 플랫 플리츠 두 개가 결합해 있는 걸 알 수 있다. 두 공방은 이를 통해 3D 퀼팅 효과를 구현했다.
쇼의 마지막 룩으로 등장한 드레스 또한 이 두 공방의 컬래버레이션. 로뇽은 선버스트와 오 보뇌르 데 담(Au Bonheur des Dames)이라는 두 가지 플리츠를 결합해 드레스의 틀을 만들었고, 르마리에는 레이스와 루렉스사, 골드 비즈를 활용해 커다란 까멜리아 패턴을 인레이 기법으로 장식했다.
모자 공방인 메종 미셸은 레더 또는 펠트 소재로 챙이 좁은 커다란 모자를 제작했다. 1950년 로베르 구센이 설립한 금세공 공방 구센은 샤넬 아카이브의 하트 모양 주얼 장식에서 영감을 얻어 금도금 액세서리를 만들었다. 이들의 노하우와 섬세한 손길 덕분에 시공을 초월한 서호와 가브리엘 샤넬의 교감이 이번 공방 컬렉션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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