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중심으로 안방과 아이 방을 연결하는 게 가능할까? 오픈 구조로 색다른 가족 문화를 만들어낸 가족의 한끗 다른 아파트 라이프. 마흔여덟 번째 #홈터뷰.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부터 머뭇거려지네요. (웃음) 예전엔 명함으로 저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는데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삶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어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명확히 소개하기가 조금 어렵네요.
우선 건축을 전공했고요. 오랫동안 건축사 사무소에서 설계 일을 하다 현재는 중 3이 되는 딸, 중 1이 되는 아들을 키우며 강의•컨설팅 등의 일을 하며 지내고 있어요. 아이가 생기면서 삶의 무게 중심도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정체성도 늘어갔던 것 같아요. 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저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에요. 편하게 읽어주세요.
결혼 후 네 번째 집, 첫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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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두 번의 전셋집을 거쳐 제 집 장만을 하게 됐어요. 신축 아파트라 깨끗하고 좋았지만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면 대공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요. 그렇다고 인테리어를 하기엔 자원 낭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조명만 교체해서 타협하며 살았어요.
지금 집은 부모님 댁 근처로 이사 온 네 번째 집입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시절,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해서 오게 된 아파트예요.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인생 첫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죠.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쌓아온 경험과 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꿈꾸었던 작은 소망들을 풀어보게 됐어요.
팔기 위한 집과 살기 위한 집 그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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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자기 집을 고치는 경험은 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건축 설계 일을 했을 때 집을 고치는 일을 했지만 제 집을 고쳐보니 주어진 조건과 이상 사이에 간극이 크더라고요. 예를 들면 유리 블록을 써보고 싶었는데 적절한 스폿이 없다거나, 멋진 서재를 갖고 싶었는데 아이들에게 방을 양보해야 하고, 개성 넘치는 재료를 쓰면 나중에 매매할 때 호불호가 될 수 있고. 이런 제약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춰가며 점차 무난한 결정으로 이어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닌 가족 모두가 생활하는 공간이니까요.
공사는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시공을 두루 하고 계신 아키프레임(@archiframe_architects) 김경민 소장님과 진행했어요. 처음부터 명확한 시안을 가지고 모든 디자인을 정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대신, 큰 레이아웃만 정하고 현장에 맞는 재료와 방법을 고민해 가면서 진행했습니다.
안방 발코니를 서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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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를 하려고 보니 안방 앞 발코니가 유독 넓었어요. 이 아파트가 발코니 면적의 일부를 화단으로 설치하면 너비를 넓게 빼도 되는 건축법이 시행될 때 지어졌거든요.
발코니를 확장해 안방의 면적을 키우기보다는 서재로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창호지로 마감한 목재 미닫이문을 설치해 공간 분리를 시도했어요. 빛이 아스라이 들어오는 점, 공간이 명확히 구분되는 점, 커튼을 설치하지 않아도 빛의 양도 적절히 조절되는 점 등 덕분에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죠. 무엇보다 미닫이문을 열 때 나는 드르륵 소리가 묘하게 정겹고 아늑한 느낌을 더해주었고요.
하지만 애초에 계획했던 용도인 서재로 쓰기는 좀 어려웠어요. 동거인이 자는 시간에 불을 켜고 작업을 하다 보니 이용시간에 충돌이 생겨 적절치 않았거든요. (웃음) 덕분에 공간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음엔 좀 더 유연한 설계를 고민해 보려고요.
거실의 무드를 잡아주는 자작나무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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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쪽 벽면을 자작나무 합판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 자체로도 따뜻한 질감과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어서예요. 마감해야 할 벽면은 5.4m에 달했는데요. 한 판으로 마감하면 너무 단조로워 보일 것 같아 전체 벽 길이를 균등하게 나눠 잡았어요. 빈 벽에 남아 있던 거푸집 흔적의 비율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 그대로 디자인에 반영한 부분도 있고요.
다만, 벽지 마감에 비하면 시간과 비용 면에서 훨씬 더 많은 리소스가 필요했어요. 목재를 부착하기 위한 바탕 작업부터 마감재 시공, 샌딩, 그리고 마감 칠까지 여러 공정을 거치다 보니 인건비가 특히 많이 들었죠. 그래도 그런 수고와 과정을 통해 완성된 벽은 단순히 마감재를 넘어서 공간의 중심이 되는 디자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문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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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철거를 시작하고 내부 마감 자재가 제거된 날것의 상태를 보게 되니 탁 트인 개방감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스튜디오처럼 아예 문이 없는 집으로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었어요. 하지만 곧 사춘기를 앞둔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꼭 필요한 곳에만 미닫이문을 설치하며 타협했고요.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안방 발코니는 문 없이 개방감 있게 연결했어요. 공사를 마쳤을 당시엔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라 숨바꼭질하고 문틈에 앉아 놀기도 했는데 지금은 지름길로 사용하고 있네요. (웃음)
아파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동선과 시선의 연결을 최대한 열어두려고 했던 이유는 공간을 더 넓어 보이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각자의 동굴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 소통하며 지내길 바랐던 마음이 더 컸어요.
식탁 의자를 통일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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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은 좀 안 날 수 있지만 경험해 보고 싶은 의자들이 많아서 천천히 소장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개성이 다 다른 의자들이 집합해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의자의 다리는 꼭 네 개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아르네 야콥센의 세 다리로 된 앤트 체어를 구매했고, 하나로 이어진 몸체가 특징인 미스 반데로에의 켄틸레버 체어, 그리고 고무줄로 만들어진 스파게티 체어도 들였어요.
의자의 소재와 특성이 너무 다 달라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식탁을 검은색 상판과 스틸 다리로 구성된 심플한 디자인으로 두니 다 품어주더라고요. 식탁이 중심을 잘 잡아주는 느낌이에요.
빈티지 액자에 비친 겨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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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 벽면에는 오래전에 구입한 Kiyo 작가님의 거울 작품과 빈티지 소품 숍에서 찾은 액자들을 함께 걸어 두었어요. 이 자리에서 지인들과 옹기종기 모여 샴페인 한 잔을 즐기는 걸 특히 좋아해요. 맑고 투명한 기포들이 만들어내는 설렘이 참 근사하거든요. 비록 와알못이지만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해요. 올 연말에는 홈파티를 계획 중인데, 그때는 위키드와이프(@wkd.seoul)를 이용해 볼까 해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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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살게 되면서, ‘제 엄마’에 대해서 자주 떠올리게 되었어요. 손에 닿는 책도 자연스럽게 엄마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죠. 요즘은 하재영 작가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는데, 219 페이지의 문장이 기억나요.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고된 시간을 통과한 지금의 내가 난 좋아.’
박연준 작가의 장편 소설 〈여름과 루비〉에서 접한 문장도 문득문득 떠올라요. ‘할머니는 변하지 않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을 이길 자는 없다.’ 그 귀한 문장들 속에서 저는 저를, 또 제 엄마를 발견합니다.
언젠가는 서촌 한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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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가족의 일상과 추억이 쌓이는 공간인 동시에, 제가 고민하고 배우며 쌓아온 삶의 철학이 스며든 곳이에요.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이곳에서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거주지를 선택하게 된다면, 저는 서촌의 작은 한옥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햇살이 가득 들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그런 집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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