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버스 사고로 차디찬 강물에 빠진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미 죽은 이들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는 가족과 연인만큼은 죽지 않고 살기를 열망하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한다. 죽음의 경계에서 이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청자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배우 김희원의 첫 연출 도전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조명가게’가 강풀 작가의 원작 웹툰이 지닌 특유의 스산하면서도 뭉클한 정서를 담아내는 동시에 투박하게 쌓아 올리는 서사를 수수께끼처럼 연결하면서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다. 버스 사고에 얽힌 여러 인물들이 지닌 애틋한 사연이 눈물도 자극한다. 전체 8부작인 드라마는 오는 11일 공개하는 7, 8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야기는 막을 내리지만 작품의 고유한 스타일을 이어가는 시즌2를 향한 팬들의 바람도 형성되고 있다.
‘조명가게’는 낡고 어두운 주택가 골목 끝에서 유일하게 밝은 빛을 내뿜는 조명가게를 찾아오는 낯선 이들의 이야기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주인 원영(주지훈)이 지키는 조명가게에 놓인 다양한 조명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이승과 저승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 물이 젖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엔 알 수 없는 비밀로 가득했던 ‘조명가게’는 회를 거듭하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비밀이 하나둘씩 공개되고 있다.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은 비오는 밤 같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강으로 추락해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이정은)는 어린 딸(신은수)만큼은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매일 조명가게를 찾아가 조명을 사오라고 시킨다. 사고로 혼수 상태가 된 남자친구(엄태구)의 의식을 붙잡아 두려는 연인(김설현)은 기괴한 모습으로 바느질을 하고, 이들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의 간호사(박보영)는 남들은 볼 수 없는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조명가게’는 극 초반 섬뜩한 공포를 자극하는 장르물로 출발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묵직한 드라마로 힘을 내고 있다. 소중한 이와의 이별을 경험했다면 극중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눈물짓는 이들의 절절한 마음에 그대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을 넘어,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날 수 없어서 애달픈 인물들의 슬픔도 있다.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고 피해자들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어두운 골목을 헤매는 자신의 상태가 지금 어떤지 인지하지 못한다. 다만 이들이 그 어두운 골목에서 벗어나 밝은 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은 몰래 움직인다.
‘조명가게’에서는 의식이 없는 피해자들을 향해 “살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의료진의 대사가 반복해 나온다. 이 말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간호사 박보영도 마찬가지. 의식이 없는 환자가 어떻게 살고자 의지를 낼 수 있을까. 그 물음은 연출자인 김희원을 자극한 말이기도 하다.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환자의)의지가 중요하냐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고 밝힌 김희원은 극중 버스 사고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관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돌이켰다.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의식이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느끼고 살아가는 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 공감대를 시청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도 중요했다. 이에 김희원은 “우리가 보는 시점에서 (환자들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가장 편안한 모습을 보여줬을 때 시청자도 그들에 다가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가장 편안하고 변화가 없는 촬영을 원해서 롱테이크로 중환자실에 누운 주인공들의 모습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조명가게’는 분명 판타지의 드라마이지만, 죽음의 경계에서 이별하는 이들의 모습을 비추면서 현실감을 얻는다. 특히 드라마가 묘사한 버스 사고는 실제로 벌어진 몇몇 대형 재난 사고를 연상케 한다. 비극적인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명가게’가 다루는 세계처럼 생과 사의 갈림길이 있다면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는 희망도 갖게 한다. ‘조명가게’가 단지 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뼈아픈 상처를 지닌 현실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작품으로 다가가는 이유이다.
강풀 작가의 섬세함은 지난해 공개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을 넘어 이번 ‘조명가게’로도 이어진다. 딸에게 자꾸만 조명을 사오라고 시키는 엄마 유희는 무섭다고 울부 짓는 딸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어쩌지 못한 채 입을 굳게 다문 엄마에겐 비밀이 있다. 사고 당시 딸을 끌어 앉고 보호하느라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 이미 장례도 치렀다. 입관 전 염습에서 입에 솜을 넣은 유희는 딸의 울부 짓음 앞에서 어떠한 말도 내놓지 못한다.
강풀 작가는 “웹툰을 직업할 때 자료 조사를 하면서 염습을 할 때 고인의 입과 귀에 솜을 넣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미 죽은 엄마의 입 안에 솜이 가득차서 딸에게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엄마의 입에 가득 찬 솜은 마지막회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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