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의 딸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위해 프랑스에서 커피 1000잔을 선결제하는 선행으로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의 한 카페는 지난 12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프랑스에 계신 교포분께서 12월 14일 토요일 촛불 시위에 참석하는 시민을 위해 1000잔의 커피를 선결제했다”라고 밝혔다.
카페는 “유선을 통해 후원하시는 이유를 듣게 됐다”라며 “그 마음이 너무 귀하시고 가슴에 울림이 가득했다. 수많은 젊은이의 당당한 외침과 손길에 감사하다”라고 덧붙였다.
선행을 베푼 주인공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정보병의 딸이자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큐레이터 그리다 씨다.
이날 그는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아침 이슬로 다시 만난 세계 : 어느 계엄군 딸의 고백문 그리고 천 잔의 커피’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는 글에서 “엄마는 꿈도 많고 재주도 많고 공부까지 잘했지만 외할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엄마의 길을 막았다”라며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군대뿐이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어느 날, 엄마는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 모인 빨갱이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그 도시에서 본 것은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정보병이었던 엄마는 거리로 나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함성과 총성, 찢어질 듯한 비명과 통곡, 매캐하고 기분 나쁜 연기, 그리고 끌려오는 무고한 사람들의 부서진 몸과 당황한 얼굴들. 그 모든 것이 지옥처럼 엄마를 짓눌렀다”라고 말했다.
또 “홀로 진실을 찾을수록 더욱 혼란만 깊어졌다. 그 와중에도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해’였다”라고 했다.
그리다 씨에 따르면 이후 어머니는 제대하기 위해 급히 남편과 선을 보고 결혼해 세 딸을 낳았다. 시간이 흘러 큰딸이었던 그리다 씨는 프랑스 남자를 만나 외국으로 시집을 갔고 몇 해 뒤 엄마 품에 손자와 손녀를 안겨줬다.
그러던 중 올여름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어머니는 그리다 씨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울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우는데, 어릴 적 설거지를 하며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르던 엄마가 떠올랐다. 노래 끝자락에 이르면 언제나 목이 메던 엄마의 뒷모습. 엄마는 왜 그 노래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을까. 광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미안함,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그들 곁에 있지 못했던 죄책감, 그리고 진실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씁쓸함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라고 털어놨다.
그 이후로 어머니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는 그리다 씨는 최근 벌어진 12·3 내란사태를 접한 뒤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자들이 이기지 않기를. 더 이상 쓸쓸하거나 외로운 사람이 없기를”이라고 바라며 천 잔의 커피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해당 사연이 SNS에서 큰 화제를 모으자 그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한 일인데 수많은 댓글로 제가 오히려 큰 선물을 받는다. 원치 않게 역사의 반대편에 계셨던 어머니의 광주에 대한 업보는 제가 평생을 두고 사죄드리고 갚겠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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