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만찬은 스웨덴의 역사와 문화를 전 세계 귀빈에게 보여주는 자리다. 지난 10일(현지 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올해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한강 작가는 한국 작가·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이 자리에서 노벨문학상 메달을 받았다. 한 시간쯤 이어진 시상식을 마치고 한 작가와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은 스톡홀름 시청사로 자리를 옮겼다. 현지 시각 오후 7시 10분쯤 한 작가는 시청사 연회장 블루홀에 등장했다. 그는 전 세계 귀빈 약 1300명이 자리한 연회장 한 가운데 귀빈석에 앉았다.
연회 당일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던 만찬 메뉴도 자연스럽게 공개됐다. 노벨재단은 전 세계 유명 요리사들이 제출한 메뉴 구상안을 깐깐히 평가해 만찬 셰프를 뽑는다. 올해는 예시에 솜마르스트룀 셰프와 프리다 베케 셰프가 각각 요리와 디저트를 맡았다. 두 스웨덴 여성 셰프는 ‘자연과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삼아 스웨덴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을 상에 올렸다.
◇ 독자적인 양조 철학·개척 정신 가진 브랜드 골라
만찬에는 술이 빠질 수 없다. 13일 노벨재단에 따르면 이번 만찬에는 프랑스 샴페인 1종,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 레드 와인 1종, 스웨덴 사과로 만든 발효주 1종 등 세 가지 술이 음식과 함께 등장했다. 샴페인은 400병, 식사에 곁들일 와인은 450병이 준비됐다.
노벨재단은 올해 만찬에 여러 국가의 술을 고르게 올렸다. 지난해 만찬 자리에는 세 가지 술 모두 프랑스 와인을 썼었다. 코로나19 이전 노벨재단은 주로 디저트 와인으로 독일산(産) 리슬링 포도로 만든 와인이나 포르투갈 포트와인을 애용했다. 올해는 널리 알려진 와인 대신 스웨덴 소규모 생산자가 만든 사과 발효주를 넣을 만큼 색다르게 꾸몄다.
주요 소믈리에들과 와인 전문가들은 노벨재단이 학자·작가·예술가들이 보여준 근면함과 성실함에 대한 존경을 올해 주류 리스트에 담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주류 전문작가 로저 모리스는 조선비즈에 “샴페인과 레드 와인은 모두 오랫동안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다른 양조가가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간 개척자(pioneer) 같은 브랜드”라고 했다. 그는 이어 “미지의 술이었던 스웨덴 사과 발효주를 넣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가진 높은 지적 호기심을 떠올린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은 건배 자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올해 노벨상 첫 만찬주로도 샴페인 라망디에 베르니에 론지튜드 블랑 드 블랑이 등장했다. 론지튜드(longitude)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지리상 경도(經度)를 뜻한다. 이 샴페인은 샹파뉴 지역 특정 경도를 지나는 포도밭 네 곳에서 자란 포도를 합쳐 만든다. 라망디에 베르니에는 과학과 문학이 국경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처럼, 지리적 경계를 넘어 온전히 자신들이 추구하는 와인을 만들고자 했다. 보편적인 사실을 묶어 가치 있는 진리를 만들고자 하는 노벨상 철학과 맞닿아 있다.
이 브랜드는 1990년대 초기부터 유기농(organic)으로 포도밭을 관리했다. 샹파뉴 지역 유명 생산자 가운데 상당수가 지속 가능성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1999년에는 생물역학적 농법으로 단계를 높였다. 생물역학적 농법은 중세부터 전해온 고전적인 포도 재배 농법이다. 살충제는 물론 유기농 비료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퇴비만 아주 조금 사용한다. 해충을 잡을 때는 무당벌레와 같은 천적을 이용한다. 이 재배법은 한 작가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던지는 ‘생명체로서 인간이라는 존재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곱씹게 한다.
세계적인 와인 중개상 재키스 뉴욕 관계자는 “라망디에 베르니에는 같은 위도에서 자란 포도를 모아 위도(latitude)라는 또 다른 샴페인도 만든다”며 “수많은 샴페인 브랜드 가운데 위도와 경도라는 샴페인을 내놓는 곳은 이곳뿐일 정도로 혁신적인 생산자”라고 했다.
◇ 주요리는 ‘소년이 온다’ 속 인내하는 인간을 닮은 와인과 함께
메인 코스는 스웨덴 고틀란드 지역 가을 송로버섯을 구운 닭요리에 곁들인 메뉴가 나왔다. 귀빈들은 이 음식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 바롤로 와인을 곁들였다. 피에몬테는 프랑스 바깥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나오는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바롤로는 19세기 이후 소위 ‘와인의 왕, 왕의 와인’이라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명성을 쌓았다.
이 와인은 네비올로라는 이 지역 토착 포도 품종으로 만든다. 네비올로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이다. 산도가 높을 뿐 아니라, 유난히 떫다. 대신 충분히 익으면 왕의 와인다운 깊은 풍미를 나타낸다. 장미 향기를 중심으로 자두 같은 과실 내음이 풍성하게 올라온다. 공들여 만든 바롤로 와인은 시간이 지나면 고유한 송로버섯 향까지 느껴진다고 와인 평론가들은 말한다.
다만 이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바롤로 이름을 달려면 의무적으로 최소 38개월을 묵혀야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공들여 만든 네비올로 품종 와인은 느리게 병 속에서 익어 가며 반세기 이상을 거뜬히 견뎌낸다. 오래 둘 수록 복합적인 풍미가 깃드는 이 와인은 한 작가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가 준 상처를 참아내고, 치유하는 인간을 닮았다.
지아코모 페노키오는 바롤로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전통주의자다. 1990년대 다른 바롤로 와인 생산자 가운데 상당수는 대중적인 입맛에 맞춰 직관적이고, 빠르게 마실 만한 와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부는 현대 기술을 적절히 활용해 상업적 성공도 거뒀다.
하지만 5대째 가족 경영으로 이 와이너리를 이끄는 클라우디오 페노키오는 이 와중에도 묵묵히 고전적인 방식을 강조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외압이나 고난에 꺾이지 않고 평생 과업에 전념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클라우디오는 조선비즈에 “노벨재단에서 미리 말해주지 않아, 올해 노벨상 만찬에 우리 와인이 쓰일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며 “인내와 끈기에 대한 결실”이라고 자평했다.
◇ 극소량 생산 스웨덴 사과 발효주로 만찬 마무리
만찬 대미를 장식한 디저트는 스웨덴 특산물 사과로 만들었다. 얇게 썬 사과를 차곡차곡 쌓아 캐러멜처럼 굳힌 다음 아이스크림과 함께 선보였다. 여기에 스웨덴 사과 발효주 부테 무세란데가 따라 나왔다.
부테 무세란데는 어지간한 주류 애호가들도 갸우뚱할 법한 술이다. 부테 무세란데는 스웨덴 북부 우메오에서 자연적으로 얼어붙은 사과를 이용해, 매년 1000병 정도만 만든다. 앞선 두 와인은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지만, 이 술은 생산량이 적어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렵다.
사과 발효주는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가 고향이다. 스웨덴 사과 발효주는 이보다 달고 진하다. 우메오 지역 사과는 여름철 백야 현상으로 성장기에 햇빛을 많이 받고 자란다. 겨울에는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 탓에 사과가 얼어 건포도처럼 쪼그라든다. 한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극단적 상황에서 더 뚜렷하게 발현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묘사했다. 사과 열매도 극단적인 뜨거움과 차가움을 반복할수록 과즙을 중심부에 농축시킨다.
독일이나 캐나다에서는 언 포도를 이용해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스와인을 만든다. 스웨덴에서는 이렇게 언 사과로 만든 발효주를 아이스사이더(iscider)라 부른다. 아이스사이더는 1990년대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스웨덴은 더 지독한 추위, 큰 일교차를 버티는 독자 품종으로 새 시장을 일궜다. 부테 무세란데는 2021년 시장에 등장한 신생 브랜드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 아이스사이더가 노벨상이 뿌리를 둔 스웨덴 자연을 기리는 동시에 ‘혁신을 일구려면 때로 전통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했다고 평했다.
제프 루이스 부테 무세란데 수석 양조가는 조선비즈에 “아이스사이더는 여름에는 사과나무가 자랄 정도로 따뜻하고, 겨울에는 사과 열매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지역에서만 만들 수 있어 스웨덴이 최적 생산지”라며 “노벨상 만찬에 쓰인 2022년산은 1200병 정도를 만들어 스웨덴 파인 다이닝에 대부분 공급하고, 100리터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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