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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갈등으로) ‘조용한 사직’이 많지 않았습니까. 내년에는 올해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교수님들이 사직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지역 병원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시기도 하고 대학병원을 그만 두고 봉직의로 전환 하시겠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
허성혁 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29일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호텔에서 열린 ‘2024 대한뇌졸중학회 국제학술대회(ICSU 2024)’ 정책 세션에서 “급성 뇌졸중 인증의, 뇌졸중센터(Stroke Center) 인증사업 등 십수년에 걸쳐 확립해 놓은 뇌졸중 치료 시스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며 씁쓸해 했다.
급성 뇌졸중 인증의는 급성기 뇌졸중 진료에 전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신경과 의사를 인증하는 제도다. 대한뇌졸중학회와 대한신경과학회가 골든타임이 중요한 뇌졸중을 365일 24시간 진료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전문 인력 운용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지난 6월부터 도입했다. 학회에 따르면 9월부터 한달 여 기간동안 신청을 받았고 서류 심사 등을 거쳐 총 505명의 신경과 전문의가 급성 뇌졸중 인증의 자격을 부여 받았다.
고상배 대한신경과학회 정책이사(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졸중 전공 여부와 급성기 뇌졸중 진료 경험은 물론 학회 교육 등에 대한 참여도 등 뇌졸중 관련 진료, 연구, 교육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를 꼼꼼히 살폈다”며 “독립적으로 환자를 보고 초급성기 뇌졸중 치료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음을 인증하는 제도로 이해하면 된다”고 소개했다. 제도 도입 초기인 만큼 첫 선발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공유하고 계속해서 공정한 심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보완 방안을 구축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뇌졸중은 혈관이 갑자기 막히거나 터져서 뇌 조직이 손상되는 질환이다. 국내 사망원인 4위이자 성인 장애 원인 1위를 차지하는 필수 중증 응급질환으로 꼽힌다.
국내에서는 매년 13만~15만 명의 뇌졸중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고령화 여파로 환자 증가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예측된다. 전체 뇌졸중의 약 80~90%를 차지하는 급성 뇌경색 치료의 골든타임은 4시간 30분이다. 증상 발생 후 4시간 30분 이내에 혈관을 막은 혈전을 녹일 수 있는 혈전용해제(tPA)를 정맥 내로 투여해야 후유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다. 큰 뇌동맥이 막힌 경우 동맥 안에 기구를 넣어 혈전을 직접 제거하는 시술이 필요하다.
대한뇌졸중학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뇌졸중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2018년 11월부터 뇌졸중센터(Stroke Center) 인증사업을 시작했다. 뇌졸중 치료과정과 시설, 장비, 인력, 환자 교육 등 뇌졸중 치료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의료서비스 품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학회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인증제도다. 이번에 급성 뇌졸중 인증의 제도를 도입한 데도 뇌졸중센터 인증의 핵심 요건인 인력 기준을 보다 정밀하게 관리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문제는 뇌졸중센터와 급성 뇌졸중 인증의가 일부 지역에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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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발표에 따르면 급성 뇌졸중 인증의 505명 중 161명이 서울, 103명이 경기 지역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급성기 뇌졸중 대응이 가능한 인력의 과반수가 수도권 지역에 편중돼 지역별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광주, 전남 지역 병원에 소속된 급성 뇌졸중 인증의는 37명, 강원 지역의 경우 14명에 그쳤다. 심지어 뇌졸중 진료 수요가 높은 권역응급의료센터가 뇌졸중센터 인증을 받지 않았거나 급성 뇌졸중 전임의가 한 명도 없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회가 뇌졸중센터, 급성 뇌졸중 전임의 같은 인증제도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정작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경복 대한뇌졸중학회 정책이사(순천향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급성 뇌졸중 발생 직후에는 충분한 인력과 시설이 갖춰진 병원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병원간 이송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며 “서울 이외 지역응급센터의 30% 이상에서 급성기 치료가 불가능해 재이송을 하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역응급센터 중 인근 취약 지역을 커버할 수 있으면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별해 거점 뇌졸중센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며 “현재 119의 급성 뇌졸중 환자 이송지침을 지역응급센터에서 뇌졸중센터로 변경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참석한 전문가들은 취약 지역의 뇌졸중센터와 전문인력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힘들고 위험 부담은 큰데 보상(의료 수가)은 적어 뇌졸중 기피현상이 심화하던 중 의정갈등이 장기화하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뇌졸중의 응급의료체계가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김영서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졸중을 전공하는 의사가 점점 줄어들면서 향후 인력난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 현장에 남아있던 의료진의 연쇄 이탈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며 “뇌졸중 진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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