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동안 인천의 섬을 돌아다니며 「섬이 차려준 밥상」을 인천일보에 올려봤다. 뭍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백령도와 이별하는 날, 우리는 인천행 배편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할 섬을 물색해본다.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을 다녀왔으니, 기왕이면 우리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섬은 어떨까? 유사랑 화백의 말에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제가 하나 알고 있습니다. 버스만 타도 바로 닿을 수 있는 섬이요!” 그리하여 우리는 늦가을이 무르익는 어느 날 밤, 신흥시장 언저리에 있는 아담한 가게에서 마지막 밥상을 마주하였다.
백령도 여자와 소청도 남자가 만나서 냉면집을 차린 곳이었다. 섬사람이 도심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저 멀리 최북단의 두 섬이 우리 곁에 바싹 다가와 있는 셈이다. 냉면집이면 응당 메밀국수 삶는 냄새가 먼저 나야 하는데, 여기는 입구부터 바닷가 냄새가 물큰 풍긴다. 수조에는 백합이며 돌해삼, 삐뚤이에 참홍합(섭)까지 귀한 물건들을 주워다가 고향 바다를 도심 한가운데에 부려놓고 있었다. 흔히 양식장에서 키워진 우럭 광어만 가득한 수조가 아니라, 철마다 소청도 앞바다에서 나는 온갖 패류(貝類)로만 잔뜩 차 있어서 꽃과 단풍이 계절을 수놓듯 바닷속의 계절이 펼쳐져 있었다. 응당 이런 곳에 들렀으니 단풍처럼 빨간 가리비나 우물거리는 돌해삼 한 접시를 시켜먹어야 제격이겠지만, 오늘은 가을비가 추적이는 밤이니 따끈하고 정겨운 음식을 먹기로 한다. 메밀 칼국수가 그것이다.
김이 펑펑 나는 그릇 안으로 메밀국수가 그득히 담겨 구수한 향이 물씬 풍긴다. 작은 냉면 한 그릇만 시켜도 주인 인심이 후해서인지 늘 국수를 두 사리씩 담아주는데, 오늘은 친해진 사람들과 엉덩이 다닥다닥 붙이고 먹는 날이라 이렇게 큰 그릇에 내주셨나 보다. 8개월 함께 배를 타며 섬에서 같이 먹고 자다 보니, 이제 궁둥이 정도는 틀 때가 되어버렸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이어서 그런지, 맞닿은 궁둥이가 따뜻하고 머리를 그릇에 함께 박고 먹는 국수 오리는 더 따뜻하다. 특별할 것 없는 칼국수일지도 모르겠지만, 기실 이 음식은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다.
본디 이 칼국수는 백령도 가을리에서 배를 타고 여기 인천 신흥동으로 이사 온 토속 음식이다. 여기 안주인은 백령도 냉면집의 딸내미였는데 소청도 발전소의 떠꺼머리 총각을 만나 여기 신흥동에 자리를 튼 것이다. 까닭에 가게에 들어서면 온통 소청도 사진이 즐비한데, 정작 간판에는 백령도 지명인 ‘가을 냉면’이라고 써있어서 늘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두 섬이 부부가 되었으니 이 가게 덕분에 소청도이면서 백령도이기도 한 기막힌 섬이 하나 탄생한 셈이다. 까닭에 별것 없어 보이는 칼국수에도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국수는 백령도 특산인 메밀국수이고 고명과 국물은 소청도 특산의 조개로 내고 있다. 말하자면 두 섬의 오붓한 사랑이 담긴 음식인 셈이니 여태 맛본 칼국수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칼국수라 자부할만 하겠다. 특히 오늘은 백합이 제철이라 귀한 백합살을 먹을 수 있어서 더 흐뭇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 중에 특별한 양념을 넣지 않고 끓여낸 국을 ‘제국’이라고 한다. 백합이나 홍합처럼 몸속에 특유의 감칠맛과 바닷물의 간기를 잔뜩 품고 있는 녀석들은 물만 넣고 끓여도 껍질을 벌리며 바다맛을 왈칵 게워낸다. 복잡한 양념을 쓰지 않았기에 심심해 보여도 먹으면 먹을수록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바로 이 제국으로 끓인 음식의 매력이다. 그런데 이 백합 제국에 구수하면서 밀가루보다 조금 단단한 메밀국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냉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메밀면수 맛을 다 알겠지만 짐짐하면서 멋없는 맛 같아도 전분기가 풀려 걸쭉한 물이 뱃속에 들어가면 뭔가 모를 안도감을 준다. 그러니 감칠맛나는 제국에 묵직한 면이 어우러져 국수 넘길 때마다 뭔가 다르면서도 어울리는 독특한 맛이 나는 것이다. 흡사 부부 사이가 그렇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도심으로 이사왔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그 고향의 자연이 내준 것으로만 음식을 만들고 있으니, 자신의 색깔을 간직하며 소박하고 꾸밈없게 만든 이 칼국수는 그야말로 ‘제국’이라는 말에 값한다 할만하다.
우리는 귀한 백합살을 까먹으며 8개월간의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우리가 방문한 섬들은 모두 이 어여쁜 백합 껍질 같은 곳이었다. 백합이라는 녀석은 껍질이 하얗기 때문에 백합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무늬가 화려하여 제각각의 모양을 가졌기 때문에 ‘백합(百蛤)’이라 부른단다. 하지만 그 단단한 껍질이 벌어지면 한결같이 연하고 보드라운 육질을 내 주기에 섬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회로 먹는 특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맞아준 섬들도 어느 곳 하나 같은 구석이 없고 제각각의 특별한 무늬로 황해를 수놓는 백합들이었다. 때로는 입을 앙다문 조개 마냥 궂은 날씨로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다가도 막상 들어가보면 우리에게 보드라운 살결처럼 섬마을의 집밥을 내주었다. 어찌 보면 그 백합의 속살처럼 보드랍고 연한 덩어리를 달리 부를 방법이 없어 우리는 그것을 ‘인심’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때로는 장봉도 앞바다 물로 몽글몽글하게 덩어리 지운 순두부 모양이기도 하였고 문갑도 산내음 가득 풍기는 벙구나물 모양이기도 하였다. 아니면 지체장애가 조금 불편할지언정 자립을 꿈꾸며 보금자리를 우리에게 활짝 열어준 혜림원 사람들의 표정속에 드리워져 있기도 하였다.
그런 인심 마냥 여기 남자 주인도 넌지시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메밀국수에 바삭한 빈대떡을 싸먹고 있는데, 안주 소용으로 쓰라고 자기네가 먹던 주전부리를 건네주신다. 말린 홍어살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게 입구에 남자 가슴팍만한 홍어며 아귀 말린 것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는데, 그걸 북북 찢어서 북어 마냥 먹는 습속이 있는 모양이다. 섬에서는 이 말린 홍어가 간식이라며 건네주시는데, 과연 옆 테이블에서는 어린 아들이 홍어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귀한 걸 먹고 자라니 부러움이 치밀지만, 덕분에 운이 좋아서 우리도 이렇게 홍어 인심을 받아보는 것이다. 말린 홍어는 쪄먹어보기만 하였는데, 생으로 먹어보니 오징어보다 감칠맛이 좋았다. 조금 질깃한 것 같아도 오래 씹으면 삼삼하며 얕은 홍어맛이 입안에 감돌아 입이 심심할 때 먹으면 제격인 음식 같았다. (나는 자리가 파하자마자 우리집 냉장고에 있는 홍어를 모두 채반에 널자고 어머니께 제안하여 그 즉시로 건작(乾作)을 감행하였다!)
부부가 만든 메밀칼국수와 어린 아들이 먹던 말린 홍어까지 먹으며 그렇게 섬이 차려준 마지막 밥상을 저녁 늦도록 들었다. 가끔 이런 음식들이 절실하고 그리울 때가 있다. 멋진 이력을 가진 요리사들이 화려한 재료와 양념으로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더 찾게되는 것이 집밥이 아닐까? 섬은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단순하지만 색깔이 분명한 맛, 꾸미지 않았지만 그래서 마음의 안도를 안겨주는 진짜 집밥들을 품고 있었다. 마치 백합 제국에 끓인 칼국수 국물처럼, 무엇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제몫을 다하는 맛을 뿜어내고 있으니 곁눈질하며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아등거리는 우리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을비가 계절을 재촉하였지만 지난 8개월 우리의 공복을 채워준 이 따뜻한 음식들은 더디 새겨지길 빌어보는 절실한 저녁이었다.
/글·사진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강사·임병구 ㈔인천교육연구소 이사장·유사랑 시사만평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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