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전기차’는 친환경 기술의 상징 같은 존재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3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약 1,400만 대로서 전년 대비 35% 증가했다. 이는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약 18%에 달하는 수치다. 즉, 10명 중 2명은 이제 전기차를 타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최근 잇달아 발생하는 전기차 화재에 운전자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10일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도로에서 테슬라 전기차 차량이 도로 경계석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화재가 발생, 탑승자 30대 남성 A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같은 달 24일 캐나다 토론토 대로를 달리던 전기차가 가드레일에 충돌 후 발생한 화재로 탑승자 4명이 숨졌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차량 내부의 ‘소화기’ 배치 유무다. 대부분의 자동차에는 차량용 소화기가 배치돼 있다. 이 소화기만 잘 사용해도 인명피해나 큰 화재를 손쉽게 막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차 화재 현장에선 소화기로 진화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화기는 전기차 화재에선 무용지물인 것일까.
◇ 전기차 배터리 화재 진압 가능한 소화기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기차 배터리 화재’에 있어서 소화기는 쓸모가 거의 없다. 국립소방연구원은 지난해 발표한 ‘전기자동차 화재대응 가이드’에서 7개의 전기차 배터리를 이용, 화재 진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차량용 분말소화기의 경우 불길이 잡히는 듯 했으나 곧바로 재발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기차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일반적으로 차량 하부에 내장돼 있다. 겉부분은 안전성 및 충돌 보호를 위해 두터운 금속케이스로 덮여있다. 때문에 내부서 화재가 발생할 시 이를 뚫고 소화기의 약제가 침투하기 어렵다.
전기차에 사용되는 배터리가 ‘리튬이온배터리’인 것도 화재 진화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리튬이온배터리는 배터리 크기보다 용량이 크고 저렴해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 필수로 사용된다. 글로벌시장조사업체 ‘에스엔이 리서치(SNE Research)’에 리튬이온배터리의 시장 점유율은 95%에 달한다.
하지만 리튬이온배터리는 화재에 취약하다. 그중 가장 위험한 것은 ‘열폭주(Thermal Runaway)’ 현상이다. 이는 온도 변화가 그 온도 변화를 더욱 가속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불이 난 전기차 배터리가 뜨거워지면 그 열로 배터리 화재가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열폭주가 발생하면 배터리 내부 온도는 순식간에 1,000도까지 치솟는다.
여기에 리튬이온배터리는 초기 화재 진압 시 물을 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리튬이 물과 반응해 오히려 폭발성 수소 기체가 발생, 화재가 더욱 커질 수 있어서다. 또한 고열에서 리튬이 분해반응하며 산소가 발생하기 때문에 분말소화기로 산소를 차단하는 방식의 화재 진압도 효과가 없다.
나용운 국립소방연구원 연구사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인 차량용 소화기는 전기차 배터리 화재 발생 시 배터리 내부에 소화약제 침투가 어려워 화재 진압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사실상 배터리 화재 진압에 있어서 소화기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임옥근 동아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도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전기차 배터리 화재 시 소화약재가 배터리 내부로 들어가기가 힘들다”며 “현재 전기차 구조상으로는 어떤 소화약재를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기차 배터리 화재는 발생 시 차체 내부에 있는 배터리 위치 때문에 운전자가 곧바로 인지하기 힘들다”며 “현재로선 운전자 혼자 화재를 진압하려는 시도보다는 빠르게 탈출한 후 소방서에 도움을 요청하는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설명했다.
◇ 소화기 무용지물? ‘NO’. 다른 화재 대비엔 필수
현재 일반 자가용 차량 전용으로 개발된 소화기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의견이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영국 소방용품전문사 ‘파이어세이프티 이큅먼트(Fire safety equipment)’에서 리튬이온배터리 전용 소화기가 판매 중이긴 했으나 하지만 이는 차량용이 아닌 가정, 산업현장용이었다.
나용운 국립소방연구원 연구사도 “전기차 단위까지 올라갔을 시 전 세계적으로 적응성 있는 소화기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화기는 전기차 화재에선 무용지물인 것일까. 전문가들은 모두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전기차 화재는 배터리가 가장 많긴 하지만 블랙박스 누선, 장착 액세서리 오류 등 일반 자동차 화재 원인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조오섭 전 의원(현 국회의장 비서실장)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기차 화재는 2020년 이후 2023년까지 94건 발생했다. 이 중 51건(54.3%)는 배터리 화재였다.
하지만 블랙박스 보조배터리, 휴대용 충전기 등 차량에 장착된 액세서리 화재가 16건(17%), 차량 기타 부품(커넥터, 운전석 열선 등) 화가 27건(28%)를 차지했다. 즉, 전기차 화재 원인이 반드시 배터리 화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용운 연구사는 “전기차 배터리에 불이 나게 되면 국내서 그걸 끌 수 있는 소화기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차량에서 화재가 나는 것은 반드시 배터리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설치한 차량용 소화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옥근 교수는 “배터리 화재가 최근 이슈가 되곤 있지만 전기차도 일반 차와 똑같이 시트가 있고 그 안에 전기 배선이 있어 화재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며 “이를 운전자가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선 반드시 차량용 소화기를 배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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