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킷 토이’. 말 그대로 서킷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자동차를 뜻한다. 서킷 토이는 일반적으로 가벼운 스포츠카 혹은 고성능 슈퍼카에게만 붙은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패밀리카, 시티카(도심형 자동차) 따위는 감히 서킷 토이라는 수식어를 넘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패밀리카는 서킷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공식을 깨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스텔란티스 푸조 브랜드다. 대개 푸조는 ‘프랑스 국민차’쯤으로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푸조는 패밀리카이면서 시티카이고 그럴싸한 서킷 토이다.
푸조는 지난 13일부터 14일까지 양일간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에 위치한 인제스피디움에서 ‘푸조 트랙 데이 2024’를 개최했다. 본 행사의 취지는 오직 하나였다. 서킷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푸조의 매력을 느껴보란 것이다. 푸조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서 인제까지, 그리고 인제스피디움에서 푸조의 전 모델을 시승했다.
129년에 걸친 모터스포츠 역사
푸조가 트랙 데이를 진행한 이유는 브랜드 역사에 있다. 푸조는 서킷과 매우 친근한 브랜드다. 129년간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라는 불리는 ‘파리-보르도-파리 트레일’에 2기통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타입 7(Type 7)’으로 첫 우승컵을 들었다. 이후 3대 자동차 경주로 꼽히는 ‘오픈휠 자동차 경주 인디 500’을 비롯해 ‘르망 24’에서도 수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월드 랠리 챔피언십(World Rally Championship, WRC)에서도 푸조는 무려 5번이나 우승을 차지했고 지옥의 랠리라 불리는 다카르 랠리에서도 우승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는 푸조 9X8 하이퍼카로 르망 24시에 참가하며 모터스포츠를 향한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푸조 3008 SUV
먼저 서울에서 인제스피디움까지 이동을 위해 푸조의 볼륨 모델인 3008 SUV GT 트림을 시승했다. 장거리 주행을 통해 패밀리 SUV의 덕목을 갖추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꽉 막힌 도로에서 3008 SUV의 주행 감각은 인상적이었다. 정체 탓에 가다 서기를 반복했지만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3008 SUV에 대한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배기량을 줄인 1.2리터(ℓ) 퓨어 테크 엔진의 힘이었다. 이 엔진은 최고출력 131마력, 최대토크 23.5킬로그램미터(㎏·m)를 발휘한다. 수치상으로는 약간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속 시 빠르게 속도를 높였고 EAT 8단 자동변속기는 한 차례도 실수를 하지 않고 속도와 주행 환경에 맞는 기어를 물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배기량의 한계도 있었다. 일상 영역과 추월 가속에서는 큰 불만이 없었지만 중고속 이상 영역에서는 속도를 높이는 게 눈에 띄게 더뎠다.
고속 주행 시 안정감은 높은 편이었다. 전륜 맥퍼스 스트럿과 후륜 트위스트 빔 구조의 서스펜션은 약간 탄탄하게 조여진 느낌으로 노면을 대응하는 능력이 우수했다. 덕분에 코너에서도 차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현상이 적은 편이었다.
서울서 인제까지 3시간쯤 달린 3008 SUV는 매력적인 패밀리 SUV가 분명했다. 퓨어 테크 엔진의 성능과 효율성, 자율주행 레벨 2 수준으로 강화된 운전자 보조시스템은 여유로운 주행을 도왔다.
서킷 토이로서 충분한 매력을 드러내다
푸조는 이번 트랙 데이를 위해 308을 비롯해 408, 3008 SUV, 5008 SUV, e-208, e-2008 등 푸조의 전 라인업을 준비했다. 먼저 서킷에 진입하기 전 몸풀기 과정으로 슬라럼과 다양한 코스로 구성된 짐카나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두 대의 408이 준비돼 있었다.
간단한 코스 설명 후 본격적인 짐카나 경기가 펼쳐졌다. 408은 슬라럼과 숏코너, 롱코너 등을 매우 민첩하게 돌파했다. 408은 짧은 간격의 콘 사이를 빠르게 달리는 상황에서도 매우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몸풀기 과정을 마친 후 서킷에 진입했다. 가장 먼저 시승한 모델은 푸조의 전기차 e-208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전기차와 서킷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했다. 주행가능거리도 그렇지만 배터리 무게로 현가하질량이 높아 기민하게 코스를 공략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134마력을 내는 e-208은 서킷에서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전기차였다. 짧은 휠베이스와 낮은 차체 덕분에 공격적으로 코너 공략이 가능했고 26.5㎏·m의 토크는 코너 탈출 시 재빠르게 속도를 높여줬다.
특히 e-2008의 움직임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소형 전기 SUV 세그먼트에 속해 있어 전고가 높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되려 바닥에 깔린 배터리가 중심을 잡으며 연속되는 코너와 헤어핀 구간에서도 높은 균형감을 보여줬다. 모터스포츠에서 쌓은 노하우가 전기차에도 깃든 것이다.
푸조의 전기차를 경험한 후에는 가장 덩치가 큰 5008 SUV를 시작으로 3008 SUV, 408, 308 순으로 시승했다. 두 대의 SUV는 기대와 달리 높은 퍼포먼스를 발휘했다. 고성능 스포츠카 혹은 해치백과 같은 민첩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여유로운 핸들링 감각으로 이어지는 코너를 공략할 수 있었다. 또 푸조 특유의 탄탄한 서스펜션 세팅은 과감하게 밀어붙여도 차체가 기우뚱거리는 현상을 줄여줬다.
서킷 토이의 진가가 드러난 모델은 308과 408이었다. 다년간의 모터스포츠에서 쌓은 기술력이 온전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EMP2(Efficient Modular Platform) V3 플랫폼과 1.2ℓ 퓨어 테크 엔진의 궁합이 매우 좋았다. 서킷에서 놀기에는 131마력의 최고출력이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피스톤의 수를 3개로 줄여 앞쪽 무게를 약 200킬로(㎏) 가량 덜어냈기 때문이다.
가벼워진 앞쪽 무게는 경쾌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가장 큰 이점을 얻은 부분은 회두성이다. 앞쪽 무게가 가벼워진 만큼 전륜에 가해지는 하중이 적어 운전자의 의도대로 민첩하게 방향을 바꿨다. 서스펜션은 다른 푸조 라인업과 동일하게 탄탄하게 조율된 느낌이다. 연석을 타고 넘거나 높은 속도로 코너를 공략하는 상황에서도 노면을 놓치는 현상이 적었다.
마지막으로 시승한 모델은 푸조의 대표 모델 308이다. 308은 시승한 모델 중 유일하게 직렬 4기통 1.5ℓ 싱글터보 디젤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출력은 131마력으로 1.2ℓ 퓨어 테크 엔진과 같았지만 낮은 회전수에서 나오는 30.6㎏·m의 최대토크 덕분에 코너 탈출 시 재빠른 가속이 가능했다. 또 1.3톤에 불과한 가벼운 무게 역시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해가 저물도록 서킷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든 생각은 하나였다. 푸조는 단순히 이동의 편리함만을 위한 패밀리카, 시티카를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시간 모터스포츠를 통해 쌓은 기술력이 양산차에 적용되면 어떤 시너지를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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