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돌아온 봄은 옅어졌다. 바다로 침몰한 세월은 더 이상 나오지 못한 채 흐려졌다.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한 그 날의 기억. 이대로 잊힐 순 없었다.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이 많이 살던 안산시 고잔동 주민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신나는 문화학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고잔동 주민들은 참사로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고 침체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정원을 가꾸고 기록물을 발간했다. 마을 여행 프로그램도 진행하며 과거의 행적들이 바라지 않도록 주민들의 역량을 모았다. 그렇게 걸어온 10년, 이제는 ‘고잔동 마을’ 자체를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들며 흐려지지 않을 기억매체를 만들어 나간다.
▲ 공간으로 함께하는 ‘신나는 문화학교’
‘신나는 문화학교’는 예술인들이 직업을 따로 갖지 않고 예술 활동 자체를 직업으로 삼자는 취지로 모인 ‘자바르떼’에서 출발한 생활 문화 플랫폼 형태의 사회적 기업이다.
안산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이웃들과 소통해온 이들은 세월호 참사 발생 후엔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과 가족들을 위한 쉼터 ‘쉼표’를 운영하며 모두의 관심 밖에서 고통받는 주변인들에게 주목받았다. 쉼표는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을 위한 쉼터로 시작했지만, 안산시의 청소년들과 이웃 주민들의 작은 문화 공간으로 바뀌어 가며 세월호 관련 활동의 거점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유가족, 예술인, 주민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진행해오던 기억과 추모의 작업을 경기문화재단 에코뮤지엄 사업인 ‘메모리얼 에코뮤지엄-곶안’을 통해 하나로 엮어 나가는 중이다.
▲ 기억전시 +3650
세월호 가족과 고잔동 주민들로 구성된 ‘곶안’ 운영위원회가 올해 역량강화 워크숍을 통해 기획한 프로그램은 전시, 주민참여 도슨트, 거점 테마 투어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중 세월호 참사와 별이 된 아이들, 고잔동 마을, 10년의 발걸음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된 전시 콘텐츠가 ‘기억전시 +3650’이다.
‘기억’이라는 테마로 고잔동에서의 다양한 기억을 전시한다. 첫 번째 전시 주제 ‘별이 된 아이들’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전 고잔동에서 살았던 10명의 참사 희생자 아이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조명하며 이들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전시한다. 행복했던 아이들의 사진을 찾고 고르는 과정은 마음 아프지만, 행복했던 미소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 기억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됐다.
두 번째 주제인 ‘고잔동의 옛 기억’에선 고잔동의 옛 모습 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립단지 마을인 고잔동은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풀내음, 가을에는 단단풍, 겨울에는 소복한 눈이 쌓이는 계절의 변화를 자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오늘, 고잔동의 옛 모습과 이곳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 자연의 정취를 담은 전시는 그 자체로 의미 깊다. 이어지는 세 번째 전시 ‘2014년의 고잔동’은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 당시 고잔동의 현장과 시민들의 자원봉사, 추모의 물결이 가득했던 당시 사진을 전시한다. 또 네 번째 전시 ’10년의 공동체 회복’에선 지난 10년간 공동체 회복을 위해 고잔동 주민과 세월호 가족들이 함께했던 기억을 전시하며 갈등과 번민 끝에 화합을 이룬 ‘고잔동’의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준다.
▲ 주민 직접 기억하고 설명하는 도슨트 ‘곶안환대’
메모리얼 에코뮤지엄 ‘곶안’에서 상설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자 주민들과 세월호 가족들이 고잔동 마을 내 기억거점을 중심으로 해설과 체험 프로그램을 배치해 진행하는 ‘곶안환대’는 주민들의 참여를 높이고 역량을 강화하는 일석이조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이 공부했던 교실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4·16기억교실’을 시작으로, 생존 학생들의 쉼터가 돼준 ‘쉼표’, 참사 이후 공동체 회복을 위해 주민들이 함께 모였던 마을카페 ‘등불’, 참사 이후 공동체 회복을 위해 주민들이 함께 가꿔온 ‘고잔동 마을 정원’, 별이 된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 ‘단원고등학교’, ‘4·16기억 전시관’, ‘4·16재단 공유 공간’ 등을 탐방했다.
고잔동과 고잔동을 구성하는 공동체, 그 속에 녹아 들어있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기억을 다시 살폈다.
주민기획단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에는 뛰어난 역량의 마을해설사들이 함께하며 유아, 청소년, 성인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고잔 커뮤니티를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곶안 운영위원회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매번 새롭게 양성되는 마을해설사들은 도슨트 프로그램과 고잔동 마을 여행 투어 프로그램, 각종 행사에서 역량 있는 재원으로 역할 하기도 한다.
고잔동 주민으로 도슨트 프로그램에서 활동 중인 박선주 마을해설사는 “2017년도에 자녀가 단원고에 입학하며 고잔동이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전엔 (참사 관련) 행사를 해도 그런가 보다 했었다”며 “세월호라는 아픈 기억을 주민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고 벽화를 그리며 오히려 마을의 분위기가 좋아지고 살기 좋은 동네로 변화해나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네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함께하다 마을해설사로 함께 하게 됐다”며 “재개발을 앞둔 시점에서 고잔동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일은 무척 뿌듯하고 보람찬 일”이라고 덧붙였다.
▲ 마을을 여행하며 축제로 즐기는 ‘기억산책’
살아있는 박물관 ‘고잔동’ 곳곳을 투어하며 축제의 개념으로 즐기는 고잔동 마을여행 ‘기억산책’은 메모리얼 에코뮤지엄 곶안의 가장 큰 프로그램이다.
‘곶안’을 주제로 스토리텔링해 만든 이동형 연극을 메인 콘텐츠로 해, 주민도슨트 ‘곶안환대’ 프로그램으로 개발된 마을 내 기억거점에서 해설과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난 2일 진행된 ‘기억산책’에서 10여명의 참여자들은 서울예대 졸업생들로 구성된 연극단 ‘동네풍경’의 배우들과 함께 고잔동 곳곳을 둘러보며 고잔동을 기억하고 세월호의 친구들을 기억하는 옆집 아저씨로, 동네 친구로 변모했다.
또 기억거점마다 곶안 운영위원이자 마을해설사로 함께한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잔동의 역사와 생태,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들과 관련한 이야기, 공동체 회복의 역사를 체험해보기도 했다.
신나는 문화학교 운영위원이자 이번 프로그램을 총괄 기획한 김태현 컬처75 이사장은 “에코뮤지엄 사업을 구성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함께하는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해설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며 “뿔뿔이 흩어져 연결되지 못했던 기억과 추모의 작업을 지속 가능한 운영이 가능하도록 공식적인 체계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에코뮤지엄 사업을 통해 고잔동이 다음 세대에게도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지혜 기자 p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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