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2004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올해로 연기 인생 20년을 맞은 배우 김신록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021)을 통해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을 제대로 터트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 OTT, 무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작품의 러브콜을 받으며 ‘대세’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전,란’(감독 김상만)에서도 그가 왜 ‘대세’인지 확인할 수 있다. ‘전,란’은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 분)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 분)이 선조(차승원 분)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돼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영화.
극 중 어떤 역경에도 꺾이지 않는 굳센 의지를 가진 의병 범동을 연기한 김신록은 단단하고 강인한 인물의 면모부터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 깊은 감정 열연까지 폭넓게 소화하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농기구를 든 액션 연기 역시 흠잡을 데 없다.
특히 범동은 원래 남성 캐릭터였지만 영화의 연출을 맡은 김상만 감독이 ‘지옥’에서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 김신록에 반해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로 재탄생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김신록은 자신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감독의 믿음에 100% 화답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김신록은 캐릭터 구축 과정부터 액션 포인트, 연기에 중점을 둔 부분 등 ‘전,란’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란’에 이어 ‘지옥’ 시즌2까지 연이어 공개하며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는 “순수함을 잃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 각오를 전하기도 했다.
-범동이 원래 남성 캐릭터였다고.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김상만 감독님이 ‘지옥’을 보고 나와 너무 하고 싶어서 초고 시나리오를 봤는데 아무리 봐도 여성 캐릭터가 없어서 범동을 여자로 하면 어떨까 제안했다고 하더라. 초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힘을 쓰는 남성 캐릭터였고 약간의 개그 캐릭터였는데 내게 넘어오면서 힘이 빠지고 도리깨 설정이 들어갔다. 그 외의 부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도 연기하면서 여자, 남자를 떠나 젠더 중립적일 수 있는 인물로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캐릭터 성별까지 바꿔가며 캐스팅 제의를 하는 게 배우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겠다.
“너무 행운이지? 이게 웬일! 이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범동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멋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구조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많이 배우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일종의 신념, 믿는 사상에 따라 움직인다면 범동은 순리에서 순리를 따르는, 마음에서 말하는 정의를 좇는 인물이라 되게 멋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멋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범동, 자네 말이 맞았네’라는 자령의 얼굴 클로즈업이 완성해 줬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이 되게 잘 나와서 범동이 이해되고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여성 의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원래 이 인물을 여성으로 바꾸자고 했을 때 감독님, 작가님 사이에서도 너무 좋은 선택이다, 배우를 떠나서 여성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했다고 하더라.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인데 여성이 의병에 들어와 있고 여성이 바지를 입고 도리깨를 들고 싸움한다는 설정 자체가 반체제적이라서 영화와 맥이 맞다고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나.
“책에서 배운 논리가 아니라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익혀 온 순리를 따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자기 나라, 이웃, 가족에게 닥친 재난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발 벗고 나서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선량하고 용감한 보통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충동적이고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논리적이고 계산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이 사람의 에너지를 쓰는 방식, 표정, 말투 같은 것들을 고민했다.
(전체적인 이야기 안에서는) 이 영화에서 천영과 종려는 개인의 미시사를 통해 신분제 사회의 한계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범동, 자령, 선조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권력과 민중의 구도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범동의 전사가 뭔지 크게 집착하지 않았고 이야기에 드러나는 구조 안에서 대조를 잘 만들어내려고 했다.”
-첫 액션이었다. 준비 과정이 궁금하고 액션에 중점을 둔 포인트는 무엇인가.
“액션스쿨에 처음 다녀봤는데 힘들었지만 선생님들이 너무 잘한다고 칭찬을 해줘서 소질이 있나보다 생각했다. 이성민 선배한테 칭찬받았다고 자랑했더니 ‘처음에 가면 다 그래’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보통 수준이구나 싶었다.(웃음) 범동은 자령의 왼팔, 행동대장 같은 인물이라서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액션이 믿음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술 감독님, 김상만 감독님과 이야기할 때 병법을 익힌 자령이나 천영, 종려와 달리 투박하고 거칠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게릴라전에서 손수 익혀 온 그런 느낌의 액션을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도리깨 제작에 공을 많이 들였다. 신체 사이즈나 움직임의 반경, 힘의 강도를 고려해 여러 차례 시범 제작이 됐다. 마지막에 나온 것은 나와 오래 합을 맞춘 도리깨였다.”
-사극도 처음이었다. 어려움은 없었나.
“‘전,란’이 여러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첫 사극인 데다 첫 액션 영화이고 첫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첫 넷플릭스 영화까지 정말 많은 첫 경험을 하게 해줬다. 특히 사극이지만 의병이라는 캐릭터였고 소위 아주 전형적인 남자나 여자로 표현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 머리를 쪽지거나 댕기를 따지 않았다. 젠더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중립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사극을 시작하게 돼 재밌고 흥미로웠다.”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의병 무리라서 박정민(종려 역), 정성일(겐신 역), 신분이 높은 차승원(선조 역)은 전혀 만나지 못했다. 주로 의병들과 천영 역의 강동원과 함께 연기했다. 영화 말미 범동이 ‘조직 이름을 다시 정해야 한다’고 하자 천영이 ‘범동계 어때, 두루 온 세상 사람이 하나다’라는 말을 하는데 시나리오에 그 장면에서 ‘파안대소하는 범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저 말을 듣고 웃음이 나올까, 웃기 어렵다, 어떻게 웃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강동원이 ‘범동’하며 쳐다보자마자 웃음이 절로 나오더라. 한국 영화의 보배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 배우의 힘으로 연기한 장면이었다.(웃음)”
-‘지옥’으로 주목을 받은 뒤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그 누구보다 바쁜 3년을 보냈다. 돌아보면 어떤가.
“특별한 3년이었다. ‘지옥’ 덕분에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기회가 많이 생겼고 연극보다 산업의 규모가 크고 관계된 사람들이 많이 다르다 보니 다양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광고도 해보고 제작발표회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이런 세계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이런 것들을 경험으로 소화하는 시간들이 굉장히 재밌다. 좋은 뷔폐에 갔더니 처음 보는 음식이 있고 그것들을 배탈이 나지 않는 선에서 한 숟가락씩 떠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고 그렇게 흘러오다 ‘전,란’이라는 또 다른 경험들을 하게 한 멋진 작품을 만나게 된 거다. 내가 어떻게 이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같이 무대에 서서 무대인사를 할 수 있었겠나. 평행우주에 와있는 것 같은, 꿈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다른 얼굴을 꺼낸다. 캐릭터에 접근할 때 자신만의 방식이나 철학이 있나.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이 있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다.’ 인물과 나의 관계에서 ‘나는 정말 그 인물로 살았어, 난 인물 그 자체야, 다 이해해’라는 것은 인물을 축소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물과 굉장히 거리를 두고 밖에서 관찰하고 인물을 표현하는 대리인일 뿐이라고 이해하면 또 너무 멀다. 그래서 ‘나는 인물을 모른다, 모르는 채 알아가기’라는 걸 좋아한다. 그게 내가 인물을 대할 때 갖고 있는 ‘매직 레시피’ 같은 거다. 그렇게 접근하려고 한다.”
-연극 무대까지 하면 올해 데뷔 20주년이다. 앞으로 20년 어떻게 보내고 싶나.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흐름 안에 있지만 흐름 밖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궁금해하면서 연기를 하고 싶다. 다양한 행위자들이 이 산업과 세계를 바꿔나가고 있잖나. 엄청 빠른 속도로. 그런 변화에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접점을 만들어가면서 매체 불문하고 장르 불문하고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윤계상 선배가 연기하는 걸 보고 감동을 받았다. 어떻게 저렇게 데뷔한 지 오래된 배우가 진실 되게,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지.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서 감동을 받았다. 아직까지 저렇게 깨끗하고 순수하다니. 나도 경력이 더 쌓이고 나이를 더 먹어도 누군가에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비쳐 보일 수 있는 연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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