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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우주에서 나이를 바라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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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건 하나씩 쌓아가는 일일까? 발을 디뎌본 도시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서재에 읽은 책들의 열이 늘어난다.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은 바람에 모은다기보다 버리지 못하는, 개봉한 아이폰 상자가 세대별로 차곡차곡 보태진다. 스마트폰이 생겨나기 이전의, 전혀 달랐던 생활방식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로. 이런 것을 쌓인다고 할 수 있다면 나라는 사람 주변으로 다양한 경험의 적층이 일어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지나온 사건들 가운데는 지금의 나다움과 연결해서 의미 짓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꽤 있다. 자기소개서를 요청받을 때 슬며시 편집하고 누락하는 편이 훨씬 깔끔한 이력들. 때로는 즐기고 가끔 애쓰거나 견디고 또 잊어버리며 또박또박 통과해 온 시간 그 자체만 정직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찍 학교에 들어가 쉬는 기간 없이 바로 사회에 나온 나는 선배들에 이어 이제 두세 살 많은 친구들이 차례로 쉰 살이 되는 걸 보고 있다. 서른이나 마흔 살 때도 갑자기 들이닥치는 빚쟁이 같은 나이의 매듭 앞에 그간의 삶을 급작스럽게 까뒤집고 정산당해 봤는데, 아무래도 쉰 살은 또 다른 모양이다. 서른 살은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 까불고 놀 때가 아니라는 자각, 마흔 살은 앞으로 기회가 줄어들 수 있으니 슬슬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을 줬다. ‘쉰 살’은 내 삶이 나도 모르는 새 반환점을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지금부터는 중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는 위기감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이 먹는 것은 하나씩 잃어가는 일인가? 청춘의 외적 아름다움을 잃어간다고 해서 서글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긍심을 가져온 부분이 지적 순발력이나 재치라는 점이다. 또 체력과 활기, 거기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명랑성,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회복하는 힘에 기대왔다. 두뇌가 무뎌지고 몸이 무거워지면 이 다음에 무엇이 올까? 갱년기가 닥치면 관절이 삐걱거리고 열감이 치솟아 잠을 못 잔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리 에스터 영화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엘르〉에서 10월호 ‘Hear Me Roar’ 화보 프로젝트의 인터뷰어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 왔을 때 그래서 수락했다. 인터뷰이 예수정은 연극과 드라마, 영화 분야를 오가며 자신의 활동 반경과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배우다.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는 대기업 퇴임 이후 자발적 공부를 이어가 리더십 코치로 일한다. 쉰 살을 넘기고 예순 살을 넘긴 뒤에도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귀한 자리인가.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종종 듣는데, 내 추구미가 그 쪽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다. 10대 때도 딱히 귀여운 편은 아니었고, 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느냐면 유능하고 단단한 사람, 가능하면 유머가 있는 인물 쪽이었다. 그러니까 내 미래를 투영해 그려볼 수 있는 언니들의 구체적 사례를 더 접하고 싶었다. 절대로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장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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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순 대표에게는 여전히 일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잘 나이 먹고 싶다면 계속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은퇴 뒤에도 사교와 취미 또는 운동이나 여행으로 세상과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익숙한 세계이니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일을 통해 오는 새로운 만남, 새로운 학습으로 사람이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얘기였다. “반드시 어떤 전문성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여가 시간에 즐기는 것을 넘어 자신이 붙잡고 싶은 일 말이죠.” 예수정 배우에게 그의 대표 작품 제목이자 현재의 나이인 〈69세〉에 대해 말을 꺼내자 도로 질문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나이를 생각하면서 살아요? 69세라는 감각은 70세나 73세랑 그렇게 다른가? 그냥 주어진 매일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바깥에서 몇 살이라는 딱지가 붙어요. 이 지구에서는 다섯 살, 서른한 살, 예순아홉 살…. 이런 이름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멀리 떨어진 우주에서 바라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일 뿐이에요.” 갑자기 무슨 권리라도 있는 양 시간을 매듭짓고 정산하려 든 게 머쓱해졌다. 내가 나대로 나의 과정 속에 있듯 그는 그의 과정 속에 있었다. 인터뷰 지면에는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최근 뭔가에 감동받은 순간이 있느냐는 질문에 예수정 배우는 본인이 참여한 작품이라고 답했다. 10월 말 개봉을 앞둔 옴니버스 다큐멘터리이자 음악영화 〈하와이 연가〉로, 그는 목소리 출연을 했다. “‘사진 결혼’이라는 걸 들어보셨어요? 일제강점기 때 어린 소녀들이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사진만 보내면 결혼이 결정돼 떠나는 풍습이 있었대요.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자의 각시가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거죠. 일본에 의해 부모를 다 잃고 그렇게 배를 타고 하와이에 가게 된 임옥순이라는 할머니의 이야기예요.” 나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을 읽고 알게 됐다고, 거기에 사진 신부 이야기가 나온다고 답했다.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알았어요. 그런데 먼 나라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그분들의 이야기가 어디로 이어질까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해서 번 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대요. 너무 놀랍지 않나요?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분들 덕분이에요. 부끄러웠어요. 여태 모르고 살았다는 게.” 순간 그가 멋있다고 느꼈다.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에 참여해 그 정수를 빨아들이는 태도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 담백하게 부끄럽다고 말하는 자세가.
그날 나는 봤다. 한국인을 온통 둘러싼, 인스타그램 릴스나 신사역 병원 광고판이나 세계관 바깥에 아름다움이 있음을. 거대한 성형과 미용 산업이 필터를 몇 겹 씌운 광택 질감의 매끈함이 전부가 아님을. 물론 패션 매거진의 전문가 스태프들이 멋진 모습으로 변신시킨 촬영현장이기는 했지만, 그런 꾸밈을 다 덜어낸다 해도 그들에게는 대화의 희열과 통하는 멋이 있었다. 무엇에 호기심을 갖고 에너지를 발산하며 눈을 반짝이는 자세, 우아한 목소리와 정돈된 화법, 몸으로 겪어온 풍부한 예화의 힘,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데려오는 신선한 어휘는 사람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그런 게 진짜라고, 의미 있다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사람의 옆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설득이 됐으므로.
여전한 질문들과 내가 채워가야 할 답의 자리를 비워둔 채로 다만 괜찮을 거라는 용기를 얻어왔다. 인터뷰는 2024년 9월 어느 날의 일이었지만 그 하루보다 그들이 내내 살아온 생의 한 조각, 삶의 몇 문장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들여다본 기분이기도 했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스스로를 작게 놓아봤다. 자꾸 멈춰 뒤돌아보는 대신 계속해서 걸어가자고 마음먹는다. 몇 살을 먹든 현재진행형의 삶을 사는 건 내 선택인 것이다.

황선우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하는 운동 애호가. 인기 팟캐스트 〈여둘톡〉 공동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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