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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에 떠나보낸 남편 안종필은 “평생이 기자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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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필 기자의 부인 이광자씨와 아들 안민영씨가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금준경 기자
▲안종필 기자의 부인 이광자씨와 아들 안민영씨가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금준경 기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약국 앞에 기관원(정보기관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남편이 누굴 만나고 다지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다. 집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건 아닌지 불안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심했던 1970년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언론인 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자유언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안종필 기자의 부인 이광자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약국 앞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늦게 귀가하면 정보기관에 잡혀간 건 아닌지 걱정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가족들의 걱정은 안종필 기자 사후에도 이어졌다. 안종필 기자는 자유언론의 상징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였다. 반공 정서가 극심하던 때로, 정권에 비판적인 행동을 하면 ‘빨갱이’ 낙인찍힐 수 있는 시기였다. 이씨는 어린 자식들이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이 악물고 버텼다고 한다. 이처럼 안 기자의 죽음은 언론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남겨진 가족들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게 됐다.

언론계에 대한 원망이 자리잡을 수 있지만, 안종필 기자의 가족들은 안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언론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가족들은 창간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매년 ‘안종필 자유언론상’ 상금을 기부하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1일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광자씨(이하 이)와 아들인 안민영씨(이하 안)를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만나 안종필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은 안 기자를 ‘기자’이기 이전에 멋진 남편이자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래는 일문일답이다.

▲안종필 기자의 부인 이광자씨가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금준경 기자
▲안종필 기자의 부인 이광자씨가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금준경 기자

– 안종필 기자와 결혼한 계기는.

이 “남편 여동생이 부산여고 동창이기에 원래부터 알고 지냈다. 1965년 11월 결혼했는데, 1년 정도 만났나. 당시 약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많이 없어 연애다운 연애는 많이 못 했다. 당시 의사 중매가 많이 들어왔는데, 의사가 너무 싫었다. 고지식하고 맹해 보였다. 그런데 기자라는 직업은 매력적이지 않은가. 정보도 빠르고, 박식하고.”

– 당시 기자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도 컸을 것 같다.

이 “왜 없었겠나. 결혼할 때 어머니는 한 달간 드러누웠다. 기자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돈? 내가 더 많이 벌었다. 하지만 안종필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인물이 좋은 건 아니지만, 멋진 사람이었다.”

– 안종필 기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이 “넓은 사람.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형편이 어려운 동료들을 도와줬다고 하더라. 쌀도 주고. ‘당신 월급은 건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월급으로 주변 사람들 도와주고 다녔던 거다. 난 참 좁은 사람인데, 달랐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낭만적이기도 했다. 눈이 오면 밖으로 나오라고 전화가 온다. 같이 눈을 맞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내가 항상 약국에 있으니 심심할까 봐 책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전부 다 그어서. 모든 면에서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갈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너무 일찍 갔다.”

안 “다정다감했다. 책을 읽어라며 윤봉길 의사 자서전이나 미카엘 엔데의 모모를 사주고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새벽에 일어나 골목에서 야구도 하고, 동아일보 사옥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권위적이지 않고, 정감가는 아버지였다.”

기자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언론탄압이 심한 유신 정권에서 그는 자유언론 운동의 중심에 섰다. 간부(편집국 차장)임에도 동아일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1975년 3월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임시분회장을 맡아 제작거부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1975년 3월17일, 10년을 다닌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직됐다.

– 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 후 상황이 급변했을 것 같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이 “사옥 밖으로 내던져지는 건 못 봤지만, 사옥에서 농성하던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이 와보라고 했는데, (내가) 세상사에 관심이 너무 없으니 현재 상황을 알려주려고 애쓴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해직됐다고 하더라.”

– 당시 안종필 기자를 원망하진 않았나.

이 “왜 안 했겠나. 피 끓는 젊은 기자도 아니고 결혼해서 자녀도 있는데 왜 앞으로 나서냐고, 나한테 미안하지 않냐고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괴로워했다. 그저 이해해달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됐고, 더 이상 괴롭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안 “사실 편집부 차장인데, 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몸소 앞으로 나섰고 투쟁에 힘을 실어줬다. 아저씨(안민영씨는 어릴 적부터 봐온 동아투위 위원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들이 아버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1975년 동아투위 위원들이 출근 시간에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파란색 원이 안종필 기자다. 사진=자유언론실천재단
▲1975년 동아투위 위원들이 출근 시간에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파란색 원이 안종필 기자다. 사진=자유언론실천재단

– 해직 이후 달라진 게 있는가.

이 “항상 불안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약국 앞에 기관원이 지키고 있었다. 남편이 누굴 만나고 다지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다. 나중에는 같이 목욕탕도 다녀왔다 하더라.
집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건 아닌지 불안했다.”

안 “이상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기자인데 평일에도 집에 있고 갑자기 ‘외할아버지 공장 일 도와주러 간다’며 나가고. 특히 동아일보 사옥으로 찾아갔을 때가 기억난다. 아버지가 동아일보 기자인 걸 학교에서도 알고 있으니, 다 같이 동아일보 탐방을 갔다. 해직된 줄도 모르고. 동아일보에 가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버지 만나러 왔다’고 하니 수위도 당황하고, 우리를 안내해주는 기자도 난감해했다. 자기는 회사에 남았는데 해직기자 아들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결국 아버지가 상황을 이야기해줬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대의를 위해 멋진 일을 했구나’라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안종필 기자는 해직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1977년 5월 2대 동아투위 위원장으로 선임됐으며 그해 12월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민주민족 언론선언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선언을 통해 “체제나 정권은 유한하지만 민중과 민족은 영원하다”며 자유언론 운동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동아투위는 이듬해 11월 언론에 보도되지 못한 학생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 등 250건의 사건을 다룬 민권일지를 발행했고 안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 안종필 기자가 구속됐을 당시 상황은 어땠나.

이 “각오하고 있었다. 시국이 살벌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운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면회 가서 ‘정의에 살고 민주화에 몸을 던지고 싶으면 결혼을 하지 말던가, 왜 나까지 힘들게 하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남편은 웃고 넘겼지만.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감옥은 도둑놈들이나 가는 건데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그저 참고 견뎠다.”

안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유신 정권의 정당성을 교육했다. ‘유신은 한국 역사에 기여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구속 사실을 알게 된 뒤 고정관념이 흔들리게 됐다. 외삼촌이 ‘아버지는 기자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명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다독여주시기도 했다.”

안종필 기자는 감옥 안에서도 언론인이었다. 안 기자는 감옥에서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고, 부처 출입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며 언론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안 기자는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진 1979년 12월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출소 후 원자력병원에서 간암을 발견했고, 1980년 2월 43세에 사망했다.

– 출소 후 암이 발견됐다.

이 “원자력병원 원장인 이장규 박사는 동아투위 위원들이 출소하면 건강검진을 해줬다. 이 과정에서 간암이 발견됐다. 의사가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오진이 아닐까 기대도 품어봤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남편은 면회 때 항상 ‘괜찮다’고만 했다. 미안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그대로 믿었다. 그렇게 아파하는지 몰랐다.”

안 “구속 후 간암을 얻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감옥 안에서 밥을 먹으면 소화를 잘 못했다고 한다. 이미 간암이 상당히 진행됐고,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 입원 중 각계각층 인사가 안종필 기자를 찾아왔다.

이 “남편의 경남고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전직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들도 다 찾아왔다. 이희호 여사는 자주 병원을 찾았고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인 공덕귀 여사는 동아투위 위원들 아내를 집에 초청하기도 했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안 “아저씨들 말로는,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이 면회를 와 사과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미안하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괜찮다, 용서한다’고 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도 찾아와 펑펑 울던 기억이 난다.”

▲1980년 안종필 기자 장례식장에서 안민영씨(중간)가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오른쪽)과 함께 안종필 기자 부고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안민영씨 제공.
▲1980년 안종필 기자 장례식장에서 안민영씨(중간)가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오른쪽)과 함께 안종필 기자 부고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안민영씨 제공.

– 안종필 기자 사망 후 삶은 어떠했는가.

이 “아이들이 옆에 있었기에 나까지 무너질 순 없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됐다. 영결식이 끝나고 딱 하루 약국 문을 닫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불리하면 상대방한테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는데, 그때는 더 했다. 6·25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그런 상처를 받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 기억밖에 없다.”

안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머니는 강인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하루 만에 일을 시작했다고 하시지만, 한 달 동안 밥도 못 드셨다. 그 이후엔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슬픔이 없다기보다 슬퍼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불러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한 거니, 잘 자라길 바란다’고 말해줬다.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봤다.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안종필 기자는 사후에도 언론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안 기자가 주장해 온 가로쓰기·한글 전용 신문인 한겨레가 탄생하게 됐다. 안민영씨가 ‘아버지와 친했던 아저씨’라고 표현한 성유보 동아투위 위원은 2014년 4월 한겨레 칼럼에서 “안종필은 오늘날에도 언론자유의 정신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며 안 기자가 자신에게 가로쓰기에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매년 10월24일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안 기자의 유지를 기리기 위한 ‘안종필 자유언론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 가족들 역시 매년 안종필 자유언론상 상금을 기부하고, 한겨레 창간발의자에 이름을 올리는 등 안 기자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 안종필 기자 사후에도 언론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한겨레는 참 의미 있는 신문이다. 평소에도 ‘신문은 가로로,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말을 참 많이 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뒤 가로로 쓰인 것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결국 이뤄졌네’라고 생각이 들더라.”

안 “안종필 자유언론상은 아버지 개인의 상이 아니다. 자유언론을 위해 투쟁한 기자들을 기리는 상이라고 본다. 다만 아버지 이름으로 상이 나가는데, 가족들이 기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동생과 함께 매년 기부하고 있다. 많은 돈을 기부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한겨레를 참 좋아했을 거다. 감옥에서도 동료 기자들이랑 가로쓰기·한글 전용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기득권·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볼 수 있는 신문을 꿈꾼 것 같다.”

– ‘안종필 기자가 살아계셨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더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

이 “남편이 국민학교 5학년 때 쓴 일기장을 봤다. ‘내 장래 희망은 기자다’라고 쓰여 있더라. 평생 기자인 사람이다. 계속 기자를 하지 않았을까.”

안 “아저씨들을 보면 언론인으로 남은 사람도 있고, 정계로 진출한 사람도 있다.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아버지는 기자를 하셨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펜을 들고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대의를 위해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해온 분이기 때문에, 언론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동아일보가 아니라 동아투위의 정통성을 잇는 한겨레에서.”

– 안종필 기자 가족들은 언론계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현재의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기자가 제대로 일을 해야 사회가 정직하게 될 수 있는데, 아쉽다. 예전에는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사명을 지키는 기자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런 기자들을 볼 수 있을까. 요즘 보면 검사들이 그리 무섭다. 그런데 기자들이 검사에 겁먹고 기사를 제대로 못 쓰는 것 같다. 사명감을 갖고 일했으면 한다.”

안 “예전 기자가 지사였다면, 지금은 직업인의 모습이 크다고 본다. 과거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졌는데, 이 자유가 오히려 한계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고, 지금의 기자들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지금 언론인에게 사명감을 요구하는 시대가 됐다. 검사들이 사회 시스템을 지배하고, 합리적 사고보다 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 언론인은 시민들이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제시해줘야 한다.”

– 안종필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이 “고맙다고 하고 싶다. 내가 남편을 더 사랑한 것 같다. 성품과 인격에 녹아졌다. 살아있었다면 더 잘했을 건데. 다시 결혼한다면? 그래도 안종필이다.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다. 아무 내색 하지 않고, 자기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다. 좋은 남편이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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