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이가섭으로 각인되는 것보다 다른 인물, 많은 캐릭터를 할 수 있는 얼굴로 봐주시는 게 더 좋아요.”
악랄한 스토커부터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형사, 섬뜩한 연쇄 살인마, 정의로운 기자, 혼돈의 시대 속 엘리트 기업가까지. 10년이 넘는 연기 인생 동안 끊임없이 변주를 이어온 배우 이가섭은 자신의 이름 석 자보다 작품 속 캐릭터 그 자체로 대중의 기억 속에 남고 싶어 했다.
이가섭은 2011년 영화 ‘복무태만’으로 데뷔한 뒤 영화 ‘폭력의 씨앗’(2017)에서 흡입력 있는 연기로 유수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며 주목받았다. 이후 영화 ‘도어락’(2018)으로 상업영화 무대에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영화 ‘니나내나’(2019), ‘노량진’(2019) 등과 드라마 ‘비밀의 숲2’(2020), ‘좀비탐정’(2020), ‘지리산’(2021)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올해도 다양한 작품에서 굵직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지난 6월 종영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삼식이 삼촌’에서 김산(변요한 분)의 막역한 친구이자 산애물산 사장 김광문으로 분해 욕망과 신념 사이 갈등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호평을 얻었고, 지난 8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정의감과 인간미가 살아있는 기자 염동찬의 젊은 시절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지난 4일 종영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연출 변영주, 극본 서주연)은 이가섭의 필모그래피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표작으로 남을 듯하다. 쌍둥이 현수오와 현건오로 분해 데뷔 후 첫 1인 2역에 도전한 이가섭은 탄탄한 연기력과 탁월한 캐릭터 소화력으로 극과 극의 두 인물을 섬세하게 빚어내며 시청자를 완벽하게 설득, 자신의 진가를 또 한 번 증명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배우라면 뛰어들고 싶은 도전이었지만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고민했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가섭은 “변영주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안경을 쓴다든가 입는 옷이나 행동 같은 것들을 세분화하면서 차이를 두려고 했다”며 “확실하게 표현해야 수오와 건오, 두 인물의 서사가 인정받을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이가섭은 디테일한 시선 처리와 말투, 표정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쌍둥이의 내면을 전혀 다른 결로 그려내 호평을 얻었다. 불안함과 죄책감에 잠식당한 두 인물의 불안정한 모습을 깊은 눈빛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는 평이다. 이가섭은 “‘시선’에 가장 신경을 썼다”고 했다.
“건오가 누군가를 볼 때와 수오가 누군가를 볼 때 시선을 다르게 뒀어요. 건오는 눈을 쳐다보고 하나하나 짚는 인물이었던 반면 수오는 시선을 약간 시선을 회피하지만 자신이 원할 때 진짜 말해야 하는 것을 할 때는 눈을 쳐다보거든요. 감독님과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쌓아나갔죠.”
쏟아지는 호평에 이가섭은 “시청자들이 보기에 ‘나쁘지 않은 배우가 있었네’ 정도의 성취는 얻지 않았을까”라면서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선배, 동료 배우들의 덕”이라며 공을 돌렸다.
“모두가 인물 그 자체였어요. 제가 잘했다기보다 팀워크, 호흡이 좋았어요. 호흡이 좋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인물들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건오일 때, 수오일 때 받아주는 리액션이 달랐어요. 거기서 오는 시너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버지 현구탁을 연기한 권해효가 주는 에너지가 상당했다고.
“구탁이 건오를 바라볼 때와 수오를 바라볼 때가 달랐어요. 수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가 건오에게는 잘해야 한다는 기대감과 압박감을 줬거든요. 그 눈빛을 보면 자연스럽게 건오가 되고 수오가 됐어요. 저는 그냥 권해효 선배의 호흡에 실려 가면 장면이 완성됐던 것 같아요. 선배가 주는 에너지, 그 상황이 주는 힘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가섭은 좋은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장면을 완성해 나가며 연기의 재미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고 치열하기만 했던 현장을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을 끝나고 ‘삼식이 삼촌’을 했는데 조금 더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통해 현장의 재미를 느꼈고 현장에 있을 때 유연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조금 더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 즐기려고 하고 흥미롭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가섭은 어린 시절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며 고등학교 때까지 바둑을 배웠다. 그러다 갑자기 연기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대학에 진학했다. “뭔가 더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며 “안에서 무언가 끓고 있었나 보다”고 떠올렸다. 그리고 꽤 충동적으로 시작된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연기를) 몇 달 하다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네요.(웃음) 이제는 부모님이 더 챙겨보시고 좋아하세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더 좋아하셨어요. 아무래도 OTT보다 TV가 접하기 더 편하잖아요. 11번만 틀면 나오니까 좋아하시더라고요. 하하. 지금의 원동력은 가족이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부모님께 늘 감사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어느덧 데뷔 13년 차를 맞은 이가섭은 “눈에 이야기가 담긴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 각오를 전하며 더 다채롭게 채워갈 앞날을 예고했다.
“재밌고 즐겁고 흥미롭게 하자는 게 지금의 마음가짐이에요. 즐기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앞서 나가기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조금 앞서 나가지 않더라도 살짝 여유롭게 재밌게 즐겁게 해도 충분히 행복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조금 더 즐기면서 사람이 남는 작업을 많이 하자는 마음이 커요.
눈에 이야기가 담긴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떤 대본을 받더라도 눈에 이야기가 있는 배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륜도 있어야 할 것이고 경험도 풍부해야 하겠죠. 그런 배우가 된다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런 배우가 되기 위해 도전하고 싶어요. 또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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