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임기였던 2021년 현대건설은 파나마의 수도인 파나마시티에 25㎞의 고가철로와 역사 13개 등을 짓는 총 사업비 28억달러 규모의 ‘메트로 3호선 사업’을 수주하면서 한국수출입은행(이하 수은)에 금융 지원을 요청했다. 수은은 현대건설에 중장기 수출 채권 매입 방식으로 총 7억6000만달러를 지원했다. 파나마 메트로공사가 공정률에 따라 현대건설에 대금지급 확약서를 발급하면 수은이 이를 매입해 현대건설에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금융을 지원한다.
중장기 인프라 사업에 널리 통용되는 방식으로 시공사 입장에선 공사대금을 조기에 회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수은 관계자는 “현대건설 컨소시엄의 성공적인 파나마 진출을 위해 우월한 금융경쟁력을 제공한 게 수주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면서 “이러한 금융 지원은 국내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해외 인프라 사업을 수주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부발전은 지난 2월 아랍에미리트(UAE)의 아즈반 태양광발전사업을 수주했다. 아즈반 태양광발전사업은 UAE 아즈반 사막 지역에 총사업비 9억달러를 투입해 설비용량 1500M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를 건설·운영하는 프로젝트다. 한국 기업이 수주한 태양광발전사업 중에서 단일 사업으로는 설비용량과 사업비가 역대 최대 규모다.
수은은 이 사업에 1억5000만달러(한화 20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금융을 제공했다. PF는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미래현금흐름을 바탕으로 대출금 상환재원을 마련하고, 프로젝트 자산·권리 등을 담보로 해당 프로젝트의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을 말한다.
지난 5월 무보는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미랄(Amiral) 석유화학 프로젝트에 1조7000억원 규모의 중장기 수출 금융을 지원했다. 무보는 해당 프로젝트 초기부터 발주처인 아람코에 여신의향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지난해에는 아람코와 사우디의 국부펀드인 PIF와 업무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 글로벌 프로젝트 필수 된 ECA 금융 지원
체코 원전 수주전에서 체코 정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해 사업자금 일부를 우리측이 금융 지원하려 한다는 의혹을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기하면서 수출 신용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20일 산업통산자원부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플랜트·인프라 수주전에선 시공사가 금융까지 직접 조달하는 ‘EPC+F’(설계·조달·시공+파이낸싱) 방식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수출신용기관(ECA)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ECA는 기업의 수출대금 미회수 리스크를 줄여주는 무역보험을 비롯해 해외 프로젝트 금융지원 제도를 운용 중이다. 한국무역보험공사(무보)의 ‘국가개발 프로젝트 특별지원’, 수은의 ‘초대형 수주지원 특별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산업부에 따르면 무보는 지난해 무역 금융으로 245조원을 지원했다. 수은은 약 77조원을 지원했다. 이러한 무역 금융 확대는 수출 성장에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21년 작성한 ‘경제환경 변화에 따른 무역보험의 역할과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단기수출보험 인수액 140조8000억원 기준 총 38조원의 수출액이 유발된 것으로 추산됐다. 무역보험에 투입한 금액의 27%만큼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정부가 수출 확대 전략을 발표할 때마다 무역보험 등 수출 금융을 확대하겠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금융 지원의 효과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엔 해외 인프라 및 원전·방산 수주를 위해 2028년까지 85조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수은 정책 금융 전략적 운용 방안’을 발표했다. 초대형 수주 지원 특별 프로그램’을 신설해 건설·플랜트 부문의 대출금리를 우대하는 등 해외 수주를 집중 지원하는 방안이 담겼다.
산업부 관계자는 “대규모 사업을 수주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자금 조달이 필수”라면서 “각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ECA가 거액의 금융을 제공해야만 프로젝트 사업을 수주하고 추진하는 게 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 ECA의 금융 지원은 어떻게 진행이 되나
해외 발주처(사업주)는 입찰 과정에서 기업의 사업 역량뿐만 아니라 금융조달 능력을 고려한다. 이를 감안해 입찰에 나서는 기업들은 금융 조달 능력을 증빙하는 서류로 ECA가 발급한 관심서한(Support Letter) 이나 여신(대출)의향서(Letter of Intent, LoI)를 제출한다.
관심서한이나 여신의향서는 우리 기업이 사업을 수주할 경우, 여신심사 절차를 통해 ECA가 금융을 지원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서한이다. 금융기관이 우리 기업이 입찰하려는 사업에 관심이 있으며, 향후 금융지원을 검토할 의사가 있다는 정도의 내용이 들어간다. 발주처의 요구에 따라 대출 조건을 명시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명시하지 않는다.
관심서한과 여신의향서는 법적 구속력은 없다. 여신의향서를 발급했다고 해서 반드시 금융을 지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 금융지원은 금융기관의 대출처럼 여신심사 절차를 거쳐 타당성이 인정될 때 진행된다.
특히 EPC 계약을 근거로 금융 지원이 이뤄지려면, 수출거래 계약조건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출신용협약에 부합해야 한다. OECD 수출신용협약은 공적수출신용 시장의 질서 유지와 무역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1978년 발효된 신사협정이다. 수출신용 지원이 과도한 보조금이 되지 않도록 최저이자율과 상환기간 등을 규율한 국제 규범이다.
국내 한 ECA의 관계자는 “위의 요건에 부합하는 경우에 한해, 상환 가능성을 평가한 뒤 실제 금융 지원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 ‘답장’ 형태로 발급된 체코원전 금융지원 관심 서한
수은과 무보가 지난 4월 4일 한국수력원자력에 발급한 서한은 회신 형태의 관심서한으로 나갔다. 문서의 제목은 ‘체코 공화국의 두코바니 원전 6호기와 테믈린 3·4 프로젝트에 대한 회신’(Re : Nuclear Power Plant Project unit Dukovany 6 & Temelin 3/4 Project in the Czech Republic) 이었다. ‘Support letter(관심서한)’나 ‘LOI(여신의향서)’ 라는 표현은 제목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문서 첫 문장에서 ‘Letter of Interest’라는 표현을 쓰며 ‘관심서한’임을 밝혔다.
해당 문서의 맨 뒤에는 “이 서한은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조달 약속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라”(Please also note that this letter does not constitute a commitment to provide financing for the project)는 표현까지 담겨져 있다.
하지만 해당 문서를 두고 야당 의원과 일부 언론에선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해 장기 저리 금융 지원을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문서에 명시된 ‘금융 지원 약속이 아니다’라는 부분은 보이지 않도록 숨기기도 했다.
14일 진행된 한수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체코 원전 수주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정진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체코 신규 원전 건설 자금을 체코 정부가 자체 조달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원전 조달 자금 24조 원 중 체코가 조달하겠다는 9조 원을 뺀 나머지 15조 원을 한국의 금융기관이 장기 저금리로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거액의 장기 저리 대출을 약속했다는 얘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도 같은 날 산업부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무역을 먹고 사는 나라에서 수출신용기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를 부당한 금융지원이라고 (비난을) 한다.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ECA의 금융 지원이 금융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야당에서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부 관계자는 “ECA는 수익성과 경제성, 상환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금융 지원을 결정한다”면서 “자금을 조달해 온 금리보다 높은 금리로 금융을 지원하기 때문에 금융 수익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OECD 협약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야당의원의 주장처럼 ‘장기 저리 대출’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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