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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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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9회
연합뉴스

9. 꽃들의 운명

언덕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감자밭에 하얀 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초록빛 양탄자에 흰무늬가 박힌 듯 아름다웠다. 이틀 동안 아기에게 몰두하느라, 단테는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꽃들을 그대로 두면 더 멋진 풍경이 되겠지만, 꽃은 감자의 양분을 빼앗는다. 꽃이 올라오는 족족 잘라내야 하는데, 자칫 시기를 놓칠 뻔했다. 이틀 밤낮을 뜬눈으로 보낸 홉은 어젯밤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로깡과 앤드류가 서툴게 아기 곁에 붙어 있더니 새벽에는 둘 다 뻗어서 코까지 골았다. 처음으로 고르게 가슴 숨을 쉬는 아기를 확인하고, 단테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 공기의 서늘하고도 투명한 바람결에 이끌려 오래간만에 이 언덕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메종(Maison)의 큰 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여서 형은 이 자리를 좋아했다. 나도 형과 함께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앉아 있곤 했다. 외진 곳이어서 남자애가 혼자 올라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낮에도 혼자 있으면 무서움이 드는 곳이었다. 형이 죽고 나니 이곳은 무덤 속처럼 고독하고 무서운 곳으로 느껴졌다. 수년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맑았고, 이렇게 혼자 거뜬히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웬일인지 형이 죽은 후 느꼈던 무섬증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형과 함께 감자를 키우던 시절의 그리움이 따스하게 온몸을 감쌌다.

메종에서 씨 뿌려 싹을 틔운 채소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감자가 식량거리가 되었다. 보통 씨감자를 심고 3~4개월이 지나면 감자를 수확했다. 바깥세상에는 개량감자로 붉은 감자나 보라색 감자도 있다지만, 개량하지 않은 푸른 감자는 이곳이 유일할 것이라고 형은 말했었다. 이곳의 기후와 땅 때문에 특이한 푸른 감자가 자생했다고 말했다. 노란 감자도 상온에 두면 독이 올라 껍질이 푸른 빛을 띠지만, 메종의 감자는 처음부터 속이 푸른 것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일한 것으로 여겨 꺼렸다. 이 나라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기에 감자를 팔 수 없다면 생활하기 힘든 곳이었다.

형은 푸른 감자가 영양분이 많고 특히 임산부에게 좋다고 할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했다. 임산부를 본 적이 없었기에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진짜 효능을 확인한 것은 형이 죽고 난 뒤였다. 어느 날 차를 달리고 있는데, 남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지쳐서 걷지 못하는 것을 남자가 부축하는 모습이었다. 단테는 차를 세웠고, 여자가 임신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두 사람은 몹시 지치고 배고프고 목말라 보였다.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차마 임산부를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메종으로 데리고 왔다. 혹여 독 있는 감자라고 여길까 봐, 단테가 먼저 삶은 감자를 베어 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허겁지겁 감자를 먹었다. 그렇게 푸른 감자를 계속 먹으며 얼굴이 푸르뎅뎅했던 임산부는 점점 몸이 좋아졌고, 이곳에서 제대로 아기를 낳았다. 남자의 이름이 홉이었다. 형이 죽고 나서 고독하고 무서웠던 이곳이 그들과 함께 편안하게 느껴졌지만, 인골을 구하는 일에 홉이 참여하면서부터 그들은 독립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깨지 않았을까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빨리 내려가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아기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질수록, 단테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아기가 오고 나서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 아기가 살아나도 앞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곳에 맡기려면 아기의 출생신고서나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려야만 하는데, 감옥으로 직행할 일이었다. 홉의 아내에게 맡기면 좋으련만, 홉은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홉의 가족까지 끌어들이기가 꺼림칙한 일이어서 단테도 피하고 싶었다. 아기가 미미하게나마 움직일 때마다 덩치 큰 남자 넷은 기적을 본 듯 감탄을 뱉어내곤 했다. 살아날지 이제나저제나 조마조마했는데, 아기가 한쪽 눈꺼풀이 아니라 두 눈의 눈꺼풀을 처음으로 연 순간이 있었다. 단테는 처음으로 탄성을 입 밖으로 올렸고, 저도 모르게 ‘라비’라고 중얼거렸다. 단테는 홉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홉!”

홉은 메종에서 두 명의 아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기와 관속의 아기를 의미했다. 아기가 첫눈을 뜨는 순간을 단테는 두 번 다 놓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것이 생명의 순간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라비라고 외쳤을 것이다. 앤드류가 물었다.

“라비가 아기의 이름이에요?”

“왜?”

“조금 전 라비라고 불렀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라비! 그럼 그렇게 부를까.”

“좋아요!”

“좋은데요!”

이구동성 찬성했다. 그때 로깡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홉만 수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수고했어요. 아기를 안고 막 달리는데, 들키면 끝장이잖아요. 목숨 걸고 줄행랑을 쳤다니까요.”

이전에는 별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얼굴들은 지쳐 보였지만 얼굴에 생기가 있었다.

“두 분도 수고했어요.”

단테의 말에 덩치 큰 앤드류가 눈물을 글썽였고, 빼빼 마른 로깡은 웬일인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테는 이 묘한 인간 조합의 균형이 자칫 깨질까 봐 일부러 차갑게 대해왔다. 그런 빗장이 언제 풀어졌는지 그들에게 진심을 전하고 말았다. 홉의 여자가 의심할까 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홉은 버텼지만, 아기를 위해 추가 필요한 것이나 양육에 필요한 노하우를 정리해오라고 했다. 아래쪽 감자밭의 흰 꽃들이 아침 빛을 받아 순식간에 많아진 듯했다.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은 푸른 감자가 보통 감자보다 영양이 좋고 특히 임산부에게 좋다며 판로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운 좋게 연줄로 감자를 사줄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단테는 15살이 될 때까지 형이 진짜 감자가루를 팔러 다니는 줄 알았다. 형의 건강상태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어느 날 정색으로 물었다. 형은 단테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정도의 돈만 벌면 그만둘 것이라고 대답했다. 형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단테는 감자가루를 자신이 팔러 나가겠다고 주장했다. 형은 펄쩍 뛰면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형이 운 좋게 만나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다는 사람들의 정체를 단테가 알게 된 것은, 형이 죽고 몇 년이 지난 뒤였다.

단테는 곧 떼어내야 하는 하얀 꽃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언덕을 천천히 내려왔다.

▶다음 회에 계속 …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9회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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