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와 카멀라 해리스의 토론회가 열린 지 2주가 지났다. 유권자들은 토론회를 보고 곧바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자기가 본 것을 바탕으로 주위 사람과 대화를 나눠 보고,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고 생각을 바꾸거나 굳힌다. 이런 프로세스가 아무리 느린 사람이라도 2주면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토론회는 두 후보의 지지율을 어떻게 봐꿨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바뀐 게 거의 없다.
토론회 자체에 대한 유권자의 견해는 뚜렷하다. 카멀라 해리스가 토론을 잘했다는 의견(63%)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해리스의 토론 승리가 두 사람의 지지율을 바꾸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난 19일에 뉴욕타임즈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두 사람의 지지율은 각각 47%로, 동률이다. 해리스의 지지율은 토론회 이후로 약간 올랐지만, 대세에 변화를 줄 정도가 아니다. 해리스가 이 조사에서 반가운 게 하나 있다면, 중요한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에서 50%를 기록해 트럼프(46%)를 확실하게 제쳤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선 토론회 한 번이 지지율을 뒤집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요지부동 판세를 보는 기자들은 머리를 긁적인다. 해리스는 토론회만 잘한 게 아니다. 바이든과 후보 교체로 대선에 뛰어든 이후로 언론의 관심—전문 용어로 언드 미디어(earned media)—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그렇게 잘 뛰고 있지만, 당장 오늘 투표를 한다면 해리스가 승리할 가능성은 트럼프보다 크지 않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는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을 60% 가까이로 보고 있다. 그런데 백인 유권자가 압도적인 펜실베이니아에서 인도계 흑인인 해리스가 트럼프를 크게 앞서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거의 향방을 예측할 때 여론조사는 중요하지만, 조사가 가진 한계점을 잘 알고 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뉴욕타임즈의 네이트 콘 기자는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임을 지적하면서, 블루칼라 백인들 사이에서 트럼프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트럼프과 동률인 해리스가 블루칼라 백인 유권자가 많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앞섰다면? 그건 어쩌면 토론회에서 해리스가 잘 하는 모습을 본 민주당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 기꺼이 참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게 콘 기자의 설명이다.
네이트 콘 기자는 더 나아가서 이번 선거가 가진 독특한 면을 지적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일반 유권자들은 정치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경우 선거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번 선거에서 두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감도는 아주 높은 편이다. 해리스는 평생 누려 본 적이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더 흥미로운 건 트럼프다. 그의 인기는 줄어들기는 커녕 더 커졌다. 트럼프가 승리했던 2016년 선거 때 트럼프를 싫어한다고 대답한 유권자들은 호감을 표시한 유권자의 두 배에 달했다. 그런데 지금은? 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반반이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에서 두 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를 “아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유권자는 20%대 초반에서 30%까지 늘어났고, 전반적인 호감도를 표시한 응답자는 40%대 후반이 되었다. 자기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트럼프가, 역시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해리스와 대결하는 선거가 2024년의 미국 대선이다.
이런 상황은 두 후보의 지지자들에게 왜곡된 현상을 보여줄 수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 단순한 승리가 아닌 압승(landslide)을 할 거라는 얘기가 양쪽에서 나온다. 일반 유권자부터 진지한 데이터 과학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특정 후보의 압승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주요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는 여전히 초박빙을 보여주고 있다면, 투표일 다음날 나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 바이든이 넉넉한 표차로 승리한 2020년의 대선 결과를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지만,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지지자들의 부정 선거 주장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압승할 거라고 굳게 믿었던 선거구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질 경우, 트럼프 지지자들은 부정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할 것이고, 트럼프에 호의적인 선거관리위원회(미국에서는 연방이 아닌, 각 주가 관리한다)에서 개표 작업을 중단하고 조사를 지시하게 된다. 특히 그 주의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한 경우 이들은 절차를 문제삼아 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주의회에서 선거인단을 직접 고르기로—합법적으로—결정할 수 있다. 물론 민주당 쪽에서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인단의 선출이 법률 문제로 번지면 이 사건은 당연한 수순으로 연방 대법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트럼프와 공화당이 채워 넣은 보수 대법관이 6대3으로 우세한 상황이다. 더 중요한 건 대법관들 정치 성향이 아니라, 자기의 어젠다를 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절차를 우습게 생각하는 그들의 최근 행동이다. 한 대법관의 아내는 2020년에 트럼프가 선거를 도둑 맞았다며 선거 부정 운동을 주도했고, 다른 대법관은 민주당이 집권한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깃발을 집 앞에 보란듯 게양했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초박빙이었던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투표용지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 플로리다주의 사례를 들며 미국의 유권자가 아닌, 연방 대법원이 이번 대선을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개표 문제가 법정 공방으로 번졌던 당시,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의 법률팀에서 일했던 변호사 중 세 사람(존 로버츠,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이 현재 연방대법관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2000년 미국 대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더 많은 표를 얻은 앨 고어 후보가 대의를 위해 기권하고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번에는 그런 기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단계까지 가기 전에 연방 대법원이 승자를 결정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선거에 미국 민주주의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얘기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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