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회사에서 어제 개업 예식을 거행하는데 인천서 화륜거가 떠나 영등포로 와서 경성에 내외국 빈객들을 수례(객차)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다시)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난 소리는 우레 같아서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연기는 반공에 솟아 오르더라. (…) 수레 속에 앚아 창문으로 내다 보니 산천 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닷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80리 되는 인천에 순식간에 당도 하였는데, 꼭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은 형형색색 황홀찬란하여 진실로 대한 사람의 눈을 놀리더라. (…)그 중에 더욱 가관되는 것은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각기 집에 국기를 세웠으며 (…) 예식을 다하고 오후 1시에 서울 빈객들과 인천 빈객들이 도로 화륜거에 올라 2시 반에 영등포에 당도하여 서울 빈객들은 서울로 들어오고 인천 빈객들은 도로 고타 4시 반에 인천에 당도하였다더라.”
20세기를 열어젖힌 이 사건을 「독립신문」 19일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1899년 9월 18일 인천(제물포)-노량진 간 33.8킬로미터 구간을 연결하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식이 있었다.
그에 앞서 1년 전인 1898년 9월 일본과 조선은 경부철도 부설권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철도 용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철도 용품과 이익에는 세금을 매기지 못하며, 완공 후 15년간 경부철도 영업권은 일본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1년 후 경인철도 개통식에 일본 국민들이 일장기를 흔들면서 환호한 이유가 다 있었다. 조선의 철도는 그러니까 일본의 것이었다. 그 철도 부설을 비용 때문에 조선인 집안엔 밥그릇까지 쇠붙이가 남아나질 않았고, 조선 노동자들이 헐값에 동원됐으며, 부설된 철도를 통해 한반도의 쌀이 일본으로 흘러나갔다. 반면 조선 반도 철도 건설에 이은 만주 철도 건설은 일본 철도 기술을 몇 단계 도약시켰고, 일본의 제국 유지를 위한 대륙의 실핏줄로 요긴하게 이용됐다.
흔히 일본은 ‘철도 왕국’이라 불린다. 1986년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집권을 이룬 일본은 서양의 압도적인 힘과 기술을 동경했다. 그 상징은 철도였다. 그 일본 철도의 기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스토리를 접했다. 일본 근대화의 산업 영웅 중에는 ‘오야토이 가이코쿠진'(お雇い外国人, 정부 고용 외국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 출신 서른살의 에드먼드 모렐은 1870년 4월 9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그는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공부한 공학자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뉴질랜드와 호주의 철도 건설에 참여했고, 1867년에는 영국의 식민지인 북보르네오의 석탄 회사에서 철도를 건설했다.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아시아의 야심찬 나라에 도착한 그는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일본 최초의 철도를 설계한다. 모렐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부 인사들에게 철도 산업과 기술에 대해 조언했고, 날씨가 나빠 공사를 쉬는 날엔 일본인 엔지니어와 측량사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지식을 나누었다.
메이지 천황과 각료들, 핵심 참모들은 1872년 10월 14일 신바시와 요코하마 역(현 사쿠라기초 역)의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다. 각 역에서 각각 2회 씩 개통식이 열렸다. 구경 나온 사람들이 기차에 탄 천황을 보며 손을 흔들고 함성을 질렀다. 00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철마위에 올라선 천황의 이미지는 일본인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운 심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최초의 이 노선 주변의 집들엔 일장기가 게양됐다. ‘노량진-제물포’ 개통식과 비슷한 풍경이다. 두 역을 연결하는 직행 열차(거리 23.8km)는 원래 53분 걸려야 했다. 그러나 개통식에서 기차는 오전 10시에 신바시를 출발해 오전 10시 54분 요코하마역에 도착했다. 1분 늦은 셈이다. 이튿날엔 왕복 운행 회수를 9회로 늘렸다. 증기 기관차 10대와 객차 50대는 영국에서 수입해 왔다. 1067mm의 협궤가 채택됐다. 일본 최초의 기차 운전수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100만 파운드 규모의 외화채권을 발행했다고 한다.
현재 도쿄 북부 우에노역에서 ‘우에노 도쿄 라인’을 타고 요코하마 역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0분, 거리에 비하면 매우 빠른 속도다. 넓은 도쿄 경제권 광역 열차가 가진 특징이자 장점은 쾌속, 급행 열차 등을 통해 장거리 승객이 만족할만한 시간 단축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요코하마 역에서 하차해 다시 네기시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면 일본 최초의 철도 노선 시작 지점인 사쿠라기초역이 있다.
원래 사쿠라기초역의 이름이 요코하마역이었으나, 지금의 요코하마역이 들어서며 이름이 사쿠라기초역으로 바뀌었다. 요코하마와 사쿠라기초역까지 구간은 당시 바다였는데 만을 따라 매립을 하고 제방을 쌓아 레일을 깔았다. 이후 1887년에 신바시에서 사쿠라기초역(당시 요코하마역)을 거쳐 가나가와현 고즈역까지 가는 철로가 개통되면서 사쿠라기초역은 ‘중간역’이 된다. 도쿄에서 사쿠라기초역에 도착한 열차는 스위치백(후진)으로 고즈역까지 운행했는데, 이것이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나오면서 현재의 요코하마역을 새로 만들었고, 사쿠라기초역은 ‘최초의 철도역’ 타이틀만 간직한 채 지금은 보통의 전철역으로 기능하고 있다.
사쿠라기초역 북쪽3번 출구로 나오면 곧바로 사쿠라기초역 철도박물관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쇼핑몰 한 편을 차지한 공간이다. 하지만 사쿠라기초 역사 기둥들을 비롯해 곳곳엔 이곳이 최초의 역임을 알리는 전시물들이 게시돼 있다. 하나 하나 찾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 전체가 박물관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박물관엔 일본 철도 건설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오야토이 가이코쿠진’들에 대한 설명이 비중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최초의 노선을 설계한 에드먼드 모렐과 함께, 토마스 알 셰빙턴(Thomas R Shervinton)은 1873년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철도 건설 기사를 맡았다. 그는 일본 철도의 핵심인 (한국으로 치면 경부선과 같은) 도카이도 본선 등의 철도 부설을 맡는다. 일본의 철도 인력 양성에 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 특유의 산악 지형에 맞는 철도 부설에 대한 연구 등과 함께 일본 철도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월터 핀치 페이자(Walter Finch page)는 주로 철도 운영 사무 등에 관한 조언으로 일본 철도의 시스템에 기여했다. 프란시스 헨리 트레비식(Francis Henry Trevithick)은 1801년 영국에서 최초로 증기력을 이용한 기관차를 만든 발명가 리처드 트레비식의 손자다. 트레비식 가문의 사람들은 수대에 걸쳐 철도 연구와 철도 산업에 종사했는데, 그의 아들인 프랜시스 트레비식은 런던 북서부 철도(LNWR)의 최초 기관차 엔지니어로 활약했으며, 프랜시스 트레비식의 다른 아들들도 헨리 트레비식처럼 영국 등지에서 철도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일본에 와서 철도 건설에 힘을 보탠다.
일본의 근대화는 이런 ‘오야토이 가이코쿠진’의 도움이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4년 기준으로 일본 정부가 고용한 외국인 전문가들 숫자는 520명 수준었는데, 당시 급여는 227만2000엔으로 국가 연간 예산의 33.7%에 달했다고 한다. 520명 중 거의 절반 이상이 영국인이었고, 영국인의 대부분은 철도 종사자들이었다. 일본이 당시 철도 건설에 국력을 쏟아다시피 한 이유는 근대화의 핵심이 철도망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철도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종합예술이다. 일본 정부는 외국인 전문가를 고용하면서 토목, 공학, 차량, 열차 운영, 교통, 서비스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데려왔다. 일본 정부가 이들을 고용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일은 그들에게 철도 기술학교를 세우도록 하고 일본인들을 철도 전문가로 양성하는 것이었다. 서양으로부터 철도 기술을 ‘사들여’온 일본인들은 그 기술을 발전시켜 조선, 대만, 만주 등 인접국 침략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다. 남는 장사라고 해야 할까.
사쿠라기초 역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이번엔 도쿄역 근처 신바시 역으로 갔다. 신바시역은 도쿄에 생긴 일본 최초의 역이다. 신바시역 건물도 ‘요야토이 가이코쿠진’이었던 미국인 건축가 리차드 P. 브리젠스가 설계해 1871년 12월 완공했다. 건설 당시엔 서양 건축물이 드물어서 ‘문명 개화’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도쿄의 명물이었던 신바시역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화재로 파손됐다. 현재 파니소닉 빌딩과 시오도메 시티 센터 사이에 있는 일본 철도 초기 시대 신바시역사 건물은 과거 모습과 위치를 고증해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한 것이다. 지금은 철도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전시관 2층엔 처음 개통했을 당시의 구 신바시역의 모습, 레일, 교량, 제방 사진 등이 담긴 귀한 영상 자료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기자가 도착한 날은 휴관일이었다.
신바시역 광장에는 D51형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과거 일본 철도성이 제작해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운행하다 퇴역한 차체로, 쇼와 시대를 풍미했던 모델이다.
철도 노선 건설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요코하마역에서 최초의 역인 사쿠라기초 역까지 가는 길은 바다와 접한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매립하고 제방을 쌓아 레일을 설치한 것이었다. 신바시 쪽에서 나가는 기차의 레일을 까는 작업도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신바시에서 요코하마를 가기 위해 지나치는 시나가와역 인근도 원래 바다였다. 당시 시나가와역 인근 다카나와의 주민들이 토지 수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다카나와 지역 만을 따라 제방을 쌓기로 결정했다. 바다를 메우고 제방을 쌓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다. 제방 공사 도중 붕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신바시역에는 당시 제방의 흔적들을 발굴 중이라는 내용의 전시물이 붙어 있다. 이미 유실된 줄 알았던 제방의 교량 등이 시나가와역 증축 공사 과정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근대 산업 유산’을 대하는 일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일본 당국은 당시 제방의 교량이 서양 건축 기술과 일본 전통 건축 기술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 영국에서 온 ‘오야토이 가이코쿠진’ 모렐은 자신이 설계한 일본 최초의 철로 개통식을 보지 못했다. 개통식 전인 1871년 9월 23일, 그는 오동안 앓고 있던 결핵이 악화돼 30대 초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지금 모렐과 그의 부인은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모렐의 묘비는 기차표 모양이라고 한다.
일본 대도시의 번쩍번쩍한 건물들 틈새에서 일본 최초의 철도가 운행한 흔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그 초라한 유적과 기록들은 일본이 근대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한 발판의 흔적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마어마한 속도전이었다. 최초의 철도를 빠른 시간에 개통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고 레일을 놓느라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됐다. 시행착오의 대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메이지유신을 거쳐 산업 국가로, 국민 국가로 나아가는 일본은 거대한 리바이어던처럼 움직였다. 서양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바심,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자 환희와도 같은 것이었을 테다.
팽창의 욕망은 결국 아시아로 향했다. 1895년 대만이 일본에 양도된 후, 일본은 대만에 철도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건설한 중국의 만주 철도(만철)은 사실상 식민 정부의 기능을 수행한 종합 회사였다. 팽창욕은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근대의 실패는 그렇게 2차대전 패망과 함께 전 세계를 찾아왔다. 인간은 비로소 ‘이성’과 ‘발전’, ‘과학 기술’과 ‘산업의 쓰임새’에 대해 윤리적 고찰을 하기 시작하면서 ‘현대’로 진입한다.
사실 일본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근대 산업 유산으로서 철도에 대한 자긍심도 엄청나다. 도쿄 북부 오미야에 있는 철도 박물관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철도와 관련된 온갖 지식들이 실물 기차와 함께 전시돼 있다. 일본은 철도 건설을 위해 서구의 기술과 지식을 배웠지만, 서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큰 부흥을 일으켰다. 일본의 ‘성공 신화’ 스토리의 이면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일본이 들여온 조선 반도의 철도는 ‘수탈’의 상징이란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최근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섞인 사도광산이나 군함도를 ‘일본 산업 유산’이란 이름으로 묶어 유네스코에 등재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N년’으로 불리는, 스스로 ‘정체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자긍심을 다시금 고취시키기 위한 우익들의 프로젝트라는 설명은 꽤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실제 이런 움직임이 본격화 된 것도 일본 우익의 상징이었던 아베 정권 때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을 다닐 때마다 항상 양가적 감정이 드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그럴수록 일본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기사는 박흥수 작가의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후마니타스)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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