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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외교 소식통들이 18일 홍콩 매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인용해 전한 바에 따르면 쑹은 문화대혁명 초창기인 1966년 8월 18일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라가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마오 주석은 쑹에게 이름이 ‘논어’에 실린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인가?”라고 물었다.
쑹이 “그렇다”고 말하자 마오는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要武)?”라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야오우(要武)’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 고등학생의 교사 구타와 자식의 부모 고발 등의 전국적인 무장투쟁을 선동하면서 잔인한 폭력 시위를 적극 주도했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모교인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중의 볜중윈(卞仲耘) 교감 등 7~8명을 직접 구타해 숨지게 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 1967년 8월 당시 동북국 제1서기였던 아버지 쑹런충(宋任窮)이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박해를 받자 그녀 역시 어머니와 함께 연루돼 수난을 당했다. 결국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인 1980년에는 세상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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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은 세월이 지나 2014년 당시 홍위병 동료들과 함께 모교를 찾아 잘못을 빌었다. 교정의 볜중윈 교감 흉상에 머리 숙여 사과한 뒤에는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도 읽었다. 이 공개 사과문에서 그녀는 “문화대혁명은 한바탕의 대재앙이었다”면서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이어 “과거의 비극과 잘못을 잊는다면 비극은 다시 재연될 수 있다.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볜 교감의 유가족은 그녀의 사과를 거부했다. 심지어 볜 교감의 남편인 왕징야오 전 중국과학원 역사 연구원은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과 대학생들은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마오 당시 주석이 만든 정치적 대중운동조직에 동원됐다. 당시 이들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받아 사망한 희생자들은 최대 수십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런민르바오(人民日報)를 비롯한 관영 매체들은 18일까지 그녀의 사망 사실을 기사화하지 않고 있다. 다만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의 인물 소개란에는 사망했다는 정보가 실려 있다. 문화대혁명이 6·4 톈안먼 사태처럼 언급이 금기시돼 있는 대동란인 탓이 아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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