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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대통령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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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사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은 평온한 나라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 성장률이 높은 주요 선진국이고, 고용률은 최고, 실업률은 최저이며 작년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일본을 넘어섰다. 수출은, 과거엔 꿈도 못 꿨던 세계 5대 강국 도약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 ‘블록버스터급’ 수출 증가는 ‘한국 경제의 붐’이 되고 있으며, 우리 경제는 “확실히” 살아나고 있다. 국가 재정은 튼튼해졌고, 국민 이자 부담은 크게 줄었으며, 코로나로 어려웠던 소상공인들에게 수십조 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국민들이 주택 걱정을 하지 않도록, 공급량도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의료 대란’이란 것도 헛소리다. 의사들이건 기자들이건, 대통령만큼 의료 현장을 안 가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대통령은 “의료 현장을 한 번 가보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한다. “특히 지역의 종합병원 등을 가 보시라.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일단 비상 진료체제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실망스러운 분(의사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응급실에 가보면, 50% 정도는 우선적으로 응급조치를 해야 하는 분들이고, 나머지는 2차나 1차 병원에서 진료해도 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응급실 의사가 부족한 것은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원래부터 그랬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다.

전공의들이 사직을 해도 응급실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면 2000명 증원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근원적이고 논리적인 의문이 떠오르지만, 대통령의 인식 속에서는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에 따르면 여당과의 소통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아주 원활하게 이지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대통령실에 ‘의대 증원 보류’를 건의했다가 단숨에 거절당했지만,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들”일 뿐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소통’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세계 속에서는 당정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세계에선 영부인이 3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받은 사건에 대한 수사도 형평성에 맞게 매우 잘 되고 있다. 예를 들면 대통령도 검사 시절에 전직 대통령 부인을 멀리 자택까지 찾아가서 조사를 한 일이 있다고 한다. (경험 많은 베테랑 검사 윤석열도 현직 대통령 부인을 조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조사 방식이라는 건 정해진 것도 아니지 않나. 과거 ‘윤석열 검사’도 휴대폰을 맡기고 들어가 지휘부와 교신이 끊겨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방식이나 장소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니 수사가 잘 된 것 만큼은 틀림 없는 일인 것 같다. 마침 서울중앙지검이 김건희 영부인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으니, 대통령의 인식과 서울중앙지검의 판단이 아주 잘 맞아 떨어진 것 아닌가. 이렇게나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없다.

채상병 특검? 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기자회견 때 ‘수사가 미흡하면 제가 먼저 특검을 하자고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8월 29일에는 “채상병의 안타까운 사망 사건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사가 저는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사가 미흡하지 않고 잘 되고 있는데, 대통령이 ‘특검 받겠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는데 왜 특검이 필요한가.

특히 한동훈 대표가 주장하고 있는 ‘채상병 특검’은 더더욱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대통령의 세계 속에서 당정간 소통은 매우 원활하게 되고 있다. 한 대표의 ‘특검 주장’도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다양한 의견 중 하나 아니겠나. 다양한 의견은 다양한 거부의 자유로 인해 결국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에 수렴된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론이나 많은 국민이 수사 결과에 대해서 특별한 이의를 달기 어렵다”며 ‘국민’들의 혹여나 품을 수 있는 마음 속의 미혹까지도 깔끔히 해소해 주면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친히 가이드를 해 주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태평성대는 이렇게 대통령이 인식하는 세계에서 지상에 현현한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까지는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받아 든 데이터나 숫자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고, 대통령이 취사 선택한 사례가 또 다르고, 참모들이 ‘좋은 것’들만 올리면서 귀에 감기는 말만 속삭이면 대통령의 인식이 그렇게 될 수는 있다. 박절하지 못해 ‘피의자’가 된 영부인을 둔 “국민의 한 사람”이자 ‘남편 윤석열’의 눈물겨운 방어권도 아주 넓게 보면 부적절함이나 범죄 혐의들과는 별개로 ‘인지상정’이라,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태평성대를 살고 있는 대통령의 인식이, 어딘가, 무엇인가 확실히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게 된 건 대통령의 다음 발언 때문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도 지금 국회 상황이,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라 제가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것을 풀어나가야 할지 용산에서도 참모들하고 많이 논의하고 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볼 것이다. (…) 저도 대통령이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같이 국회를 바라볼 때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고, (국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해야 하지 않겠나. 해야 할 본연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인사청문회나 다양한 청문회를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이때까지 바라보던 국회하고 너무 달라서 저도 깊이 한번 생각해보겠다.”

4월 10일 나왔던 충격적인 총선 결과는 희한하게도 대통령만 비켜 간 것 같다. 왜 국민의힘이 108석이 됐고, 왜 여소야대가 됐는지, 그런 국회에서 대통령을 엄호하는 여당이 왜 판판 깨지고 있는지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국회) 상황”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지금 ‘국민의 한 사람’이 돼 국회를 바라보고 “제가 이때까지 바라보던 국회하고 너무 다르다”며 오히려 국회가 이상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왜 국회가 이렇게 이상하게 됐을까? 대통령의 세계에선 영원한 ‘미스리’다. 4월 10일 총선 결과를 혹시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지난해 11월 범죄자를 사면해 보궐선거에서 내보냈다가 참패한 이후, 채상병 수사 외압 사건의 핵심 피의자 이종섭 씨를 호주 대사에 임명하고, 청와대 수석의 ‘언론인 회칼’ 발언이 터지고, 대파 875원과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사실이 언론 지상을 도배할 때, 무엇보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의 암울한 전망을 지나오면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 사고를 뚫고 왔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여소야대 국회를 바라보며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라고 말하면 바라보는 유권자들은 극심한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현실 인식 능력을 점검한 후에, 대통령의 현실 인식 능력이 이상해졌음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인사’ 얘기에선 기괴함마저 느껴진다. 집권 여당이 유사 이래 최악의 참패를 겪고 나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이 사표를 냈는데, 대통령은 그들에게 “총선 패배가 귀하들 책임이냐. 계속 근무들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사직하겠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사표를 수리했다는 거다.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한덕수 국무총리는 총선 끝난지 4개월도 채 안돼 아예 공개적으로 ‘재신임’을 공표 ‘당했다’.

총선 패배의 책임이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국무총리에게도 없다면, 보통의 경우 자신을 의심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숱한 실정으로 여당이 108석 의석으로 쪼그라들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갑자기 국회를 바라보면서 천진난만하게 ‘처음 보는 국회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보통 사람의 인식을 넘어선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대통령에게 본인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모두 원래 없던 일 같은 것, ‘환상’같은 것은 아닐까.

엄중한 안보 상황에 따라 국방부장관 인사를 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김용현 후보자는 이 결정을 빨리 안 했으면 아마 신원식 현 장관이 조금 더 하고 아마 뒤에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라며 “윤석열 정부 장관 후보군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다 보니 인사가 좀 빨라지지 않았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일국의 국방장관을 10개월 만에 교체하는데, 그 이유란 게 그냥 ‘차례가 빨리 왔다’는 것이다. 인사 철학이 부재하다는 걸 아무런 생각 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대통령을 우린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우직하다고 해야 할까.

현실이 힘들 때 보통 사람들은 방어 기제를 작동킨다. 내면으로 숨어들고 환상을 창조해 낸 후 현실을 잊는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국가는 망가진다.

대통령은 지금 보통 사람들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정말 이때까지 바라보던 대통령하고 너무 다르다.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볼 때,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고,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대통령의 상태다.

야당과의 관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당 대표의 건의조차 대통령의 ‘거부권’에 쓸려나가는 상황이면, 대통령에게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고 말할 사람이 주위에 남아 있질 않다는 말이 된다. 대통령은 고립의 길로 가고 있다. 그 길의 끝엔 탈당이 있고, 그 탈당의 끝엔 정말로 대통령도 국민도 ‘처음 보는’ 국회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위기를 모르는 게 위기다.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전자상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 방송이 중계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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