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의연한 정소민
」
올여름은 비가 잦네요. 촬영장에 오면서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 우산을 손에 들고 바쁘게 걸어가더군요
어머, 그래도 여행을 떠난 입장이라면 그런 변수도 괜찮을지도요. 저도 평소에 굉장히 계획적인 성격인데 여행지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게 싫지 않더라고요. 전시를 본다거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방법도 있을 테고요.
‘오히려 좋아!’ 모드가 되는군요(웃음). 8월 17일 방영을 시작한 〈엄마친구아들〉(이하 〈엄친아〉)의 로그라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엄마친구아들이 벌이는 유쾌하고 따뜻한 파란만장 동네 한 바퀴 로맨스’. 이 수식어 중 정소민의 방점은 어디에 찍힐지
‘동네 한 바퀴’가 다른 작품과 저희 작품이 가장 구분되는 지점을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가요. 혜릉동이라는 동네에서 자라난 소꿉친구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네에서 그려지는 일을 담거든요. 이곳저곳 로케이션 촬영을 다니며 여러 동네 풍경을 조금씩 가져오고 있는데, 모두 예스러우면서 따뜻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엄친아 최승효(정해인)와 배석류는 ‘흑역사’를 공유하는 사이입니다. 내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의 존재는 정소민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어릴 때 이사를 많이 다녀서 소꿉친구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새 친구를 사귀는 걸 힘들어했던 시기도, 오래 알고 지낸 주변 사람에게 둘러싸인 환경에 대한 로망도 있었죠.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게 된 면도 있지만요. 지금 가장 가깝고 오래된 친구 둘은 고등학교 친구인데, 항상 고마워요. 제 미숙하고 모자란 시기까지 지켜봐주고 포용해 준 사람들이니까요.
시간이 주는 힘이 있죠
맞아요. 지금은 환경도, 하는 일도 너무 다른데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특별함과 함께한 시간에서 오는 위안이 분명 있어요.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갯마을 차차차〉 〈일타 스캔들〉을 연출한 유제원 감독과는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2018)로 만났던 적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감독님은 어떻던가요
유제원 감독님은 독보적으로 유니크한 캐릭터예요(웃음). 예전에 감독님이 제게 ‘시골에서 벌어지는 살짝 촌스러우면서 밝은 장르의 작품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원래 밝고 따뜻한 분이라 그때도 ‘아, 그런 것도 감독님과 잘 어울리겠다’ 싶었죠. 몇 년 만에 다시 보니 그사이 레벨업된 게 느껴졌습니다. 자신을 살짝 낮추며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으세요. 덕분에 다들 자기 실력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주연배우로서는 고마운 부분이겠네요
엄청 많이요! 그리고 아시죠? 서로 고마운 마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
배석류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일련의 사고를 겪고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재벌집 딸, 귀여운 고등학생, 취업난 끝에 취직한 신입사원 등 다양한 인물을 연기해 왔는데요. 석류의 어떤 점에 끌렸나요
석류는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캐릭터죠. 〈이번 생은 처음이라〉(2017)의 지호 역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배경이 실제 저와 똑같아서 깜짝 놀랐던 적 있는데요, 장녀로서 겪는 에피소드를 비롯해 석류도 그런 면이 있어요. 승효한테 “동네 형 같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밝지만 또 은근히 책임감이 강한 모습을 자꾸 응원하고 싶더라고요.
정해인 배우는 ‘로코물’ 도전이 처음이죠
지난해 제가 출연했던 영화 〈30일〉을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장르적인 경험은 제가 더 많지만 현장에서는 저도 의지가 많이 돼요. 해인 씨의 코믹한 모습을 본 적 없기에 사람들의 기대감도 있을 테고, 승효도 캐릭터 자체는 진지하거든요. 해인 씨와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아요.
〈30일〉은 전국 2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분 좋은 기록을 세웠습니다. 작다면 작은 영화가 그런 기록을 세운 것은 오랜만이었어요
많은 분이 내 이야기 혹은 주변 이야기로 공감해 주셨던 것 같아요. 사랑하던 연인이 서로 익숙해지면서 상대의 장점보다 단점에 집중하게 되는 건 로맨스의 현실적인 일면이니까.
이번 작품을 통해서는 어떤 이야기나 공감을 전하고 싶나요
촬영을 하며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고 있는 작품이에요. 다른 분들과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역사와 아픔 등을 극복해 가는 각기 다른 과정을 보면서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지점을 보고 힘을 얻길 바라요.
‘엄친아’는 남부러울 것 없이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잖아요. 정소민은 사람의 어떤 면모를 부러워하는지
의연함. 타고나길 의연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사실 다 알잖아요. 대부분의 일은 내가 걱정을 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흘러가거나 뜻밖에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사람은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을 부러워하기 마련인데, 인생에서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큰 타격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타고난 평온함이 부러워요. 저는 불안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해 보이기 위해 많이 노력했거든요.
당신을 오래 봐온 사람들이 당신을 부러워하는 부분도 있을까요
음, 부럽다고 한 건 아니지만 제가 고민 상담을 잘해주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가끔 “똑 부러지고 똑똑하다”고 말해 주면 조금 ‘현타’가 와요(웃음). 다른 사람의 고민 상담은 객관화되니까 쉬운 것일 뿐, 제 일에는 전혀 똑 부러지지 못하거든요.
현실적인 정소민의 여정 중 〈환혼 파트 1〉(2022)은 조금 특별한 이력입니다. 판타지 장르물에서도 그렇게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보여줄 줄 몰랐어요. 여전히 다양한 시도에는 열려 있나요
그럼요. 저는 항상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고, 신선한 제안을 받을 때 즐거워요. 특히 무덕이는 캐릭터 자체도 좋았지만 ‘판타지 사극’이라는 특별한 장르에서만 만날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요.
그런 도전 정신이 지난해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 무대로 이끌기도 했겠군요
도전이라기보다 단순하게 결심했어요. 대본이 들어왔고, 원작 영화를 재미있게 봤기에 좋아하는 작품이니까 해보자 싶었죠. 그리고 그 시간이 정말 큰 행복을 가져다줬고요. 배경은 16세기지만 비올라는 그 시대에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캐릭터라 애정이 갔어요. 사람들과 연습하며 무대를 만들어가는 즐거움, 내가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느꼈죠.
새삼스럽지만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은
연기를 전공하다 보면 셰익스피어 작품은 많이 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하면서 소네트의 매력에 눈을 떴어요. 처음 봤을 때는 말로 내뱉으면 하염없이 이질적일 것 같던 대사들이 들여다볼수록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깨달았죠. 가장 큰 수확 중 하나예요.
상상 속의 이야기를 진짜처럼 구현해 내야 하는 배우로 살아가는 정소민에게 ‘진짜’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삶의 어떤 것은 100% 진짜고, 어떤 건 100% 가짜이고,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건 다 섞여 있죠. 배우로서 내가 느끼는 것만큼 충실히 해내는 것, 일부러 뭔가를 더하거나 덜어내지 않는 게 제가 생각하는 ‘진짜’에 가까운 삶 같아요.
근면한 자의 멜로, 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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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칸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9월 개봉을 앞둔 〈베테랑 2〉 팀과 함께였죠
작품으로 영화제를 찾을 일이 많지 않은데 그게 또 ‘칸’이라니 얼떨떨했어요. 레드 카펫을 밟고, 완성된 영화를 긴장된 상태에서 처음 보고, 기립박수도 받고. 감격스러우면서도 왠지 쑥스럽더군요. 신기루 같은 시간이지만 기억하고,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 스코틀랜드, 튀니지 등 이국적인 풍경도 보여요. 떠나는 걸 즐기는 편인가요
스코틀랜드는 운 좋게 임시완 배우와 〈배우는 여행중〉 촬영으로 다녀오게 됐죠. 팬 미팅이나 브랜드 행사로 다른 나라를 찾게 되더라도 ‘일단 비행기 타고 나가면 여행이다’라고 생각합니다(웃음). 틈 내서 뭐든 하려고 해요. 사람들이 한 번쯤 다 사진 찍는 곳도 들르고요. 잠깐이라도 뭘 봐야 다음번에는 제대로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생기잖아요.
〈갯마을 차차차〉의 유제원 감독과 신하은 작가 콤비가 조우한 〈엄친아〉 또한 기대를 받고 있는 작품이죠. 로맨스물 속의 정해인은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로코’는 처음입니다
코미디 연기 자체가 처음이에요. 제가 직접 코미디 연기를 한다기보다 놓인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것이지만요. 주인공뿐 아니라 가족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각 인물의 이야기가 굉장히 따뜻하고, 치유되는 요소가 있어요. 이전 작품들이 장르적 성격이 강하다 보니 로맨스물이 그리웠는데, 모든 요소가 잘 맞았죠.
어머니 역할인 장영남 배우는 ‘아프리카통 외교부 커리어 우먼’, 아버지(이승준)는 아들 바보인 응급의학과 교수라더군요. 범상치 않은 가족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오가는 정서적 요소도 있지만 부부끼리 ‘케미’도 있어요. 극중이지만 그 모습들을 보는데 아들로서 좋더라고요(웃음). 대본을 볼 때 전체적인 줄거리도 열심히 봐요. 내 역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서사나 이야기 구조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승효의 어떤 지점에 끌렸나요. 과거 수영 선수이자, 현재 건축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건축가라는 ‘엄친아’스러운 설정은 언뜻 ‘로코물 남주’의 클리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수영 선수 출신의 건축가라는 수식어가 굉장해 보이지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해온 운동이라고 해서 완전 엘리트 선수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클리셰처럼 보일까 하는 우려 또한 없어요. 그런 것에 매몰되기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여전히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나요? 정해인이 관찰한 정소민은 어떤 사람인지
소민 씨는 섬세해요. 지문에 쓰여 있지 않은 움직임을 표현하거나 동선을 자유롭게 쓰는 법을 알고, 표현력도 풍부해서 항상 신 자체가 대본보다 풍성해지죠. 기본적인 성향도 생각이 많고, 상대방의 감정을 계속 신경 쓰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느낌을 촬영하면서 많이 받고 있어요. 아마 메이킹 필름을 보면 현장에서 제가 많이 웃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도 배려심 많고 유쾌하시거든요.
그걸 다 알아채는 정해인도 섬세한 사람 아닐까요
그럴지도요(웃음). 민감한 사람끼리 생기는 공감대일지도 모르겠네요.
〈커넥트〉에 출연했던 김혜준 배우가 정해인은 “에너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100으로 쓰는 배우”라더군요
그건 혜준이가 자기소개한 것 같은데요? 혜준 씨가 최선을 다해 그런 연기를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봐줬다니 좋네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매사 최선을 다하려는 성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 같은지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죠. 그래도 요즘 완급 조절을 합니다. 촬영이 길게는 1년을 넘기도 하는데, 처음부터 너무 ‘활활’ 태우면 중간에 어쩔 수 없이 지치게 되더라고요.
그나저나 회사에서 제작한 유튜브 콘텐츠를 보니 떡볶이에 정말 진심이더라고요. 양념 색과 토핑 구성을 보고 브랜드명을 맞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떡볶이는 소울 푸드잖아요. 저도 초등학생 때부터 하굣길에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를 먹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리고 브랜드별로 특징이 명확해서 모를 수 없는데요? 아마도 그래야 경쟁이 되는 거겠죠. 경쟁사와 다른 지점이 있어야 각자 니즈에 맞는 소비층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원래 모든 것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보는지
그냥 제 혀가 그렇게 느끼고, 제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인데(웃음)! 꼼꼼하고 디테일한 성격이긴 합니다. 항상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큰 재해가 발생하기 전에는 반드시 작은 사고와 징후들이 있다는 ‘하인리히 법칙’처럼요. 사고뿐 아니라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도 그 전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작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죠.
엄친아라는 단어처럼 정해인이 부러워하는 타인의 면모도 있을지 궁금합니다
음,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보며 어떤 동력을 얻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부러움은 제 동력이 아니에요. 다만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은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존경과 존중의 마음이 들죠. 부러움과 선망은 또 다른 감정 같거든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행복하느냐예요. 일을 하며 얻는 성취감과 뿌듯함, 중간중간 주어지는 작은 휴식과 가족, 팬들 같은 것. 행복감을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하죠.
〈봄밤〉에서 보여준 어른스러운 남자의 얼굴, 〈유열의 음악앨범〉에 남은 청춘의 얼굴이 있는가 하면 〈디피〉 〈서울의 봄〉에서 보여준 정의로운 얼굴도 있죠.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어떤 얼굴을 남겨둔 것이 가장 마음에 들까요
작품 하나하나 다 제 연대기 같아요. 어느 것 하나를 꼽지 않고 그 시기의 제 모습을 모두 좋아하지만, 앞으로 또 계속 바뀌어나갈 수도 있겠죠. 여러 작품을 만나고, 감정을 경험하면서 여러 얼굴이 입혀질 테니까요.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와 색 자체는 변주만 될 뿐 확확 바뀌지는 않겠죠. 제가 지금 이런 사람이 된 것도 그렇게 태어나 자랐기 때문인 것처럼요.
지난해 데뷔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촬영장이죠. “액션!” 하는 순간 그리고 “컷!” 하는 소리. 이야기에 내가 녹아들어가 실제로 상대방도 나를 믿고 있고, 나도 나를 믿고 있을 때 오는, 모든 게 딱 맞아 돌아갈 때의 느낌이 있어요. 그 모든 과정이 하나하나 모여 결과물이 나왔을 때도 기쁘죠. 영화든 드라마든 세상에 공개된 작품을 사람들이 즐겨준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고 행복하고요.
모든 과정을 사랑하는 거네요
맞아요. 복합적이에요. 절대 단순할 수 없어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이야기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나도 그랬어’ ‘나도 저런 감정을 느꼈지’ 라고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이야기면 좋겠어요. 때로는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작품을 통해 느끼며 대리만족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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