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진영 기자] 모든 것이 양날의 검이다. 故 이선균의 유작, 실화이자 우리의 아픈 역사에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허구의 인물 등 장단점이 명확하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에 따라 평가가 갈릴 ‘행복의 나라’다. 다만 배우 이선균의 묵직한 열연은 오랜 시간 깊은 여운을 안길 것으로 예상된다.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이선균)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조정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10.26 대통령 암살 사건과 12.12 사태를 관통하는 숨겨진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법정 개싸움 일인자인 정인후는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들게 된다. 정인후는 군인 신분 때문에 단 한 번의 선고로 형이 확정되는 박태주가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지만, 불공정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에 분노를 터트린다.
사건 발발 30분 전, 박태주는 정보부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경호원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행동이 ‘내란의 사전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가 법정의 쟁점으로 떠오른다. 정인후는 박태주가 빠져나갈 수 있는 증언을 제안하지만, 박태주는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자세로 일관한다.
10.26을 계기로 위험한 야욕을 품은 합수단장 전상두(유재명 분)는 자신만만한 정인후를 조롱하듯 재판을 감청하며, 재판부에 실시간으로 쪽지를 건네 사실상 재판을 좌지우지한다.
故 이선균이 맡은 박태주는 10.26 사태를 주도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심복이자 거사에 참여한 육군 대령 박흥주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또 유재명이 연기한 전상두는 故 전두환을 연상케 하는 인물로, ‘서울의 봄’에선 황정민(전두광 역)이 연기한 바 있다. 반면, 조정석의 정인후는 가상의 인물로, 당시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와 주변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당 재판은 실제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 여러 차례 법정에 은밀히 쪽지가 전달되어 이른바 ‘쪽지 재판’으로 불렸다. 또한 유일한 군인 신분이었기에 단심제가 적용된 박흥주 대령에게 첫 공판 이후 단 16일 만에 최종 선고가 내려져 ‘졸속 재판’이라 언급되기도 했다. 영화는 역사적 두 사건을 관통한 최악의 정치 재판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큰 사건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서울의 봄’이 떠오르고, 비교 아닌 비교를 하게 된다. ‘서울의 봄’이 마치 다큐를 보듯 인물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사건에 집중했다면, ‘행복의 나라’는 정인후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충실히 따라간다. 박태주를 통해 애증의 아버지를 떠올린 정인후는 점차 그에게 동화되고, 시대의 야만성에 분노하며 홀로 맞서 싸운다.
그러다 보니 정인후가 그 시대 변호인단뿐만 아니라 현재 극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까지 대변해 소리치고 울분을 터트려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관객들이 정인후에 이입해 극에 더 깊게 빠져들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신파가 될 수도 있다. 정인후의 눈물겨운 고군분투는 충분히 뜨겁고 드라마틱하지만, 후반 정인후가 전상두를 골프장에서 대면하고 일갈하는 장면은 조정석의 “판타지”라는 설명처럼, 비현실적이라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故 이선균의 마지막 얼굴은 박태주의 상황과 맞물려 먹먹함을 안긴다. 조정석은 영화를 보며 극의 캐릭터가 아닌 이선균이 떠올라 무너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관객 역시 다르지 않다. 배우 이선균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 새삼 ‘연기 잘하는 배우였지’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선균뿐만 아니라 조정석, 유재명 등 배우들의 호연은 ‘행복의 나라’를 지탱하는 큰 힘이다. 그간 밝고 코믹한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던 조정석은 한층 더 깊어지고 묵직한 감정 열연으로 극의 중심축을 잡는다. 진심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과 표정이 일품이다. 악역으로 돌아온 유재명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연기는 소름을 유발한다. 감정을 꾹 누르고 있음에도, 낮게 깔린 목소리와 날이 서 있는 눈빛, 분위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며 색다른 전상두를 완성했다.
8월 14일 개봉. 러닝타임 124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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