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자리 뺏는 게 광복절보다 중요?
할아버지의 후광에 탁월한 출세 역량
우리에게 건국일이 있으면 왜 안 되나
이종찬 광복회 회장과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 등이 정부 주도의 8·15광복절 기념행사 참가를 거부했다.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가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데 대해 항의하는 뜻이라고 한다. 광복회와 주변 독립 관련 단체들에다가 제1야당까지 나서서 투쟁대열을 형성한 것을 보면 김 관장의 위상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얼마나 힘이 센 자리이고 영향력이 큰 인사이기에 그 사람을 쫓아내려고 거대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6개 정당이 임명 철회 요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정도라는 것인가. 광복절을 기리는 것보다 김 관장을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인식하는 듯한 태도도 어이없다.
남의 자리 뺏는 게 광복절보다 중요?
이들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이 회장이 제공했다. 그는 지난 7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 집중’에 출연해 “용산 어느 곳에 일제 때 밀정과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대통령실 안팎에 윤 대통령과 일제가 은밀히 음모를 꾸미는 일을 돕는 밀정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1936년생이니까 82세다. 너무도 유명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일생을 그 후광 속에 살았다고 짐작이 된다. 정관계의 현직(顯職)을 두루 거쳤고 지금은 광복회 회장으로 있다. 누구보다 점잖고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밀정’ 운운이라니!
이 회장은 김 관장을 ‘뉴라이트’로 규정하면서 “연구는 학문의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독립기념관으로 와서 침범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당사자가 ‘뉴라이트’ 아니라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는지 황당하다. 이른바 좌파 운동권의 낙인찍기에서 배웠는가? 이들은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회장이 좌파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파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에 있거나, 자유자재로 양측을 오가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뉴라이트’를, 왜 기결수나 되는 것처럼 매도하는가. 이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시대사조 가운데 하나였다. 그걸 이 회장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좌파들이 ‘친일 반민족 극우’ 세력 또는 사조로 단정해 버리는 근거가 궁금하다. 그러는 사람들은 극좌인가? 아무리 그들과 그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한들. 극좌세력의 프레임 씌우기, 주홍글씨 새기기, 낙인찍기만큼 고약하기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이다.
이 회장이 설마 할아버지의 독립공훈에 기대어 행세해오지는 않았으리라고 믿고 싶다. 자신의 이력만으로도 아주 화려하다. 육사 16기 졸업, 주영국 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국회의원(11~14대, 민정당‧민자당),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 민정당 원내총무, 정무 제1장관, 민정당 사무총장, 새한국당 창당 및 대선 출마(김영삼과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탈당해서 창당, 후에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 선언),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국가정보원 원장 등이 그가 섭렵한 주요 공직이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서 언제나 이기는 편을 골라 요직을 차지하는 탁월한 역량을 과시했다. 윤석열 대선 후보의 멘토(그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로 알려졌고, 지금은 광복회 회장으로 건재하다.
할아버지의 후광에 탁월한 출세 역량
그가 독립기념관 신임 관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뉴라이트인데다 친일 인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김 관장을 친일 인사로 단정한 근거는 관장 후보 면접 때의 답변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어디냐”고 질문했더니 “일본”이라고 대답하더란다. 그게 친일의 증거 아니냐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닌가”라는 게 김 관장의 대답이었다. 일시적으로는 일본의 국민으로 살았던 건 역사적 사실이다. 이걸 지적한다고 ‘친일’로 낙인찍으면 그 ‘친일’에 속하지 않은 한국인이 있을 수 있을까?
건국절 광복절 논쟁도 뻔한 이야기로 올가미를 씌우는 이 광복회장과 한국 좌파의 상투화법이다(이들 사이에 교집합 부분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경우는 낙인찍기 수법이 유사하다). 건국은 나라를 세우는 것(Nation Building)을 말한다. 대한민국을 세운 시점은 1948년 8월 15일이다. 나라를 세웠으니 개국일 혹은 건국일이고, 국권을 회복한 날이니 광복절이 맞다.
1945년 8월 15일은 일왕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이로써 우리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다. 실제로 일제 세력을 몰아내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상징성에서 그날은 해방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해방된 날이 광복절의 기산일이 됐다. 이치로 따지면 48년이 맞는데도 이 회장 등은 딴지를 건다.
그는 윤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려 한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대통령실에서 건국절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밝히자 이 회장은 그렇다면 김 관장이 물러나라고 한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사퇴 압박이다. 김 관장 자신도 건국절을 반대한다는데도 이 회장은 13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사면초가인 관장이 과연 독립기념관을 운영(하는 게) 가능하겠어요?”라고 엉뚱한 트집을 잡았다.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놓고는, 시끄럽게 됐으니 사퇴하라는 거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독립기념관의 ‘독립’이라는 표현 자체도 우리의 경우와는 맞지 않는다. 독립은 부족체 또는 부족연맹체 정도의 집단으로서 외세의 지배를 받다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게 아니다. 13개 주가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전쟁을 벌여 영국 세력을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이루고 당군(唐軍)을 북쪽으로 축출함으로써 대동강~원산 남쪽 지역에 한민족의 원형이 성립된 이후로만 따지더라도 1348년이 된 나라다. 그런데 새삼 무슨 독립인가? 국권수호, 국가복원, 외세축출 등 적절한 표현 다 두고 독립이라니? 몰아낸 후 독립국가의 건설을 완성한 것이다.
우리에게 건국일이 있으면 왜 안 되나
물론 우리 선열들이 일제 식민 지배 시절 먼 이역을 떠돌며 나라 되찾기에 목숨을 바쳤던 역사를 잊을 수는 없다. 그때 그분들이 ‘독립’ ‘독립운동’이라고 표현했으니 그것을 존중하는 게 맞지만 그래도 용어는 정확히 써야 한다. ‘개천기념관(開天紀念館)’이라는 그럴듯한 대안이 있는데 왜 굳이 독립기념관으로 지었는지 당시에도 이해가 안 돼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야말로 일본의 교만을 키워주는 이름이다. 우리는 일시 세력을 잃어 일제에 강점당하고 국권을 강탈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도 우리는 수많은 국난을 겪었고 그때마다 결국은 이겨냈다. 그 모든 역사를 모아서 개천기념관 안에 국난 극복관, 민족 융성관, 찬란한 문화관, 빛나는 미래관 등을 배치하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김 관장이 지적한 바처럼 왕조마다 개국 혹은 건국이라고 의미 부여를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 인식이라면 대한민국이 새로 세워졌는데 그날을 건국일, 개국일이라고 못 부를 까닭이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나 이 회장처럼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 회장이 정한 광복회 연호로는 올해가 대한민국 103년이다. “단군 이래 반만년의 역사를 놔두고 무슨 건국이냐”라고 따지면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하는 속내는 뭔가
.
그의 조부는 1932년에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상해임시정부와는 이어지지만 1948년의 대한민국과 맺어질 연고는 없다. 할아버지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상해임시정부에 집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정식정부일 수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한민국이 그때 세워졌다고 우기는 것이다(짐작되기로 그렇다).
어쨌든 이번 독립기념관장 관련 소동은 이 회장 자신이 추천한 인사(김구 선생의 손자 김신 씨)가 선택되지 못한 데 대한 화풀이성 위협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원로로서 창피한 일 아닌가?. 독립기념관장을 독립지사의 후손이 맡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실제로 김 관장 이전 10명의 관장 중 8명이 독립유공자 후손이었다), 그렇다고 이 회장과 광복회의 지정석은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은 아이디어와 의지를 갖추고 독립기념관을 발전시키는가에 있다고 생각되는 데 아닌가?
국가의 덕을 남보다 많이 본 원로가, 사회적 대립과 갈등에 기름을 끼얹는 것은 보기에 아주 딱하다. ‘할아버지의 공적은 할아버지의 것’이라는 의식이 확고하다면 그 위광에 기대어 자기 세력을 뽐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제발 많이 누린 사람들이 정신 차리길!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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