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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한겨울 매화의 봄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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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국가와 사회가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결하셨습니다. 병든 이 시대가 반기기에는 선생님께서 너무나 올곧은 삶을 일관하셨습니다. 악하고 추악한 것들은 목에 낀 가시처럼 선생님을 마다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럴수록 선생님이 계신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929번지는 인권과 양심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에 몸 바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하나의 성지였습니다. 진정 그러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적막하여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는 이에게는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들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이셨습니다. 원주의 그 잡초가 무성한 집은 군부독재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친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고, 선생님은 언제나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 시대를 변혁한 큰 업적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한 알의 작은 좁쌀'(一粟子)로 자처하며 사셨습니다. 원주시 봉산동의 그 누옥에서 오로지 먹과 벼루와 붓과 화선지를 벗 삼아 한낱 이름 없는 선비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참으로 고결한 삶이었습니다.”

1994년 5월 22일 무위당 장일순이 영면했을 때 장례식에서 리영희 선생이 남긴 고별사를 들어보면, 리영희 선생이 장일순에게 품었던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은 “한낱 이름 없는 선비로” 생을 마친 장일순을 왜 그리도 그리워했던 것일까.

루이제 린저가 지은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미리암]에 관한 소설 「미리암」(현존사, 1988)에서, 미리암은 열여섯 살 되던 해 나자렛에서 예수를 처음 만나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소년을 만난 그날부터 그리고 훨씬 후에도 나는 수없이 나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묻곤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구였으며, 그가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와 한 번 만난 사람은 그를 결코 잊지 못했는가? 사람들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었고, 미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이 사랑은 샘물에 비교될 수 있었다. 어떤 한순간 터져 나온 이 사랑은 끊임없이 땅속을 흐르면서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히 매인 끈과 같은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 역시 장일순을 처음 만나 영원히 인연을 이어갔다.

리영희 선생은 믿을만 해

리영희 선생이 장일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김지하가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지하는 천주교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과 원주의 인맥을 잇고 있었다. 나중에 한살림 운동을 도맡아 하던 박재일도, 「금관의 예수」를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처음으로 공연하면서 김민기를 장일순과 이어준 사람도 김지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을 처음 만났던 때를 남한강 유역의 재해대책 사업을 시작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원주교구 재해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던 1973년 이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장일순을 중심으로 한 원주그룹은 자문위원으로 서울에 있는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그중에는 농촌문제연구소 김병태 교수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이문영 교수 등이 포함되었다.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를 신자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해 교구민들을 의식화하는 데 앞장선 것도 그때였다. 지학순 주교는 사제들에게도 사회과학 공부를 하도록 독려하고, 원주교구가 세상에 맞서는 하나의 ‘전위대’처럼 움직이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리영희 선생은 원주교구에 자주 불려 갔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은 리영희 선생을 교구청으로 자주 초대해 이른바 ‘정세분석’을 받았다. 한국 사회 현실과 외국의 정세에 관한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리영희 선생의 식견에 대한 장일순 선생의 신뢰가 대단했다.

리영희 선생은 자신에게 인생의 목표와 사상의 거처를 제공해 준 사람이 루쉰(鲁迅, 1881-1936)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하게 되었다.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삶에 안주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동시대의 제도적, 인위적 조건들로 말미암아 고난받는 이웃들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깨달음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남방주말」 2006년 12월 14일 문화면) 리영희 선생은 루쉰에게서 얻은 ‘진정한 지식인’의 초상을 무위당 장일순에게서도 발견하고, 그이와 함께 할 뜻을 비쳤다.

“무위당 선생은 농민들뿐 아니라 가톨릭 신도들에게 사회와 인간의 관계 특히 정치, 경제, 문화,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인간들로서의 우리 농민들, 대중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관해서 많은 교육도 하시고 그런 프로그램에 관여도 하게 되었죠. 74년인가, 그 무렵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억압과 착취관계 속에서 고생하는 농민들을 교육할 때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그런 운동을 강조했거든요. 그 교본이 파울 프레이리라는 교육자가 쓴 「피압박자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 같은 책이었어요. 그런 종류의 책들을 장 선생의 부탁을 받아서 제가 번역을 했지요.”(「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녹색평론사, 2004, 131쪽)

리영희 선생은 1976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장일순 선생의 부탁으로 종로에서 해외서적상을 하는 동창생을 통해 군사독재 시절에 구할 수 없었던 책들을 200여 권이나 원주로 보내 준 적이 있었다. 이 책을 장일순 선생은 필요한 부분을 번역해 신자들을 의식화 자료로 사용하곤 했다. 「장일순 평전」(한상봉, 삼인, 2024)을 쓰면서, 나는 장일순을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원주교구를 기획했던 ‘공동설계자’라고 불렀는데, 장일순 선생은 드러나게 활동할 수는 없었지만, 은밀하지만 열정적으로 지학순 주교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리영희는 이를 두고 “장 선생은 외국 언론기관과의 인터뷰나 국가기관과 관계할 때 좀처럼 표면에 안 나섰어요. 언제나 뒤에서 지학순 주교님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드리고는 했지요. 사실 지학순 주교님은 본래 사회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인자하시고 순진하셨으며, 열정적인 분이었어요. 무위당 선생과의 은근하고 태연한 관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지요.”(리영희 대담,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사)무위당사람들 엮음, 2020, 66쪽)라고 전한다.

▲리영희는 거의 매년 장일순 선생 추도식에 참여했다. 오른쪽은 2008년 5월 무위당 기일날 묘소 참배에서 남긴 사진이다. (왼쪽부터 장화순, 리영희, 김영주) (출처: 황도근 무위당학교 제공)

그만한 사람은 없어

리영희 선생은 굳이 원주교구의 요청이 없더라도, 마음이 답답할 때면 무작정 술 한 병 챙겨서 원주로 장일순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시퍼런 새벽녘에 잡풀이 우거진 봉산동 집 마당에 서 있곤 했다. 전표열과 나눈 대담에서, 리영희 선생은 “너무나 그 살아오신 삶이 놀랍고, 우러러보이고, 우리 속세에만 사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삶이었는데, 거기서 크게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참 자주 드나들고 가깝게 지냈습니다.”(「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녹색평론사, 2004 130-~131쪽)라고 말하는데, 지금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상에는 어딘가에 산에서 도인생활 하시는 분들도 있고 하겠지만, 그런 크기를 지니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같은 책, 137쪽)

리영희 선생은 오히려 “실생활에서 당신 사모님이나 아이들과 좀 더 정답고 재미있게 사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할 만큼 장일순 선생의 일상을 더 챙겨주고 싶어 했다. 이는 단순히 장일순 선생의 현자 또는 지사적 풍모를 존경하는 것을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을 ‘동지’보다 ‘동무’로 여긴 듯하다. 1928년에 태어난 장일순 선생과 1929년에 태어난 리영희 선생은 한 살 터울이어서 더욱 애틋한 마음이 싹텄다고 보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서로 다른 길을 걸어 한 곳에 이르려는 ‘동반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장일순 선생을 흠모한 까닭은 어쩌면 단순한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영희 선생이 늘 서울에서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언제나 각박했고 숨 쉴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사안은 늘 급박했고, 지식인의 책무를 다그쳤다. 이런 점에서 원주는 리영희 선생에게 숨통과 같은 공간이었고, 막힌 생각을 열어주는 활로였을 것이다. 이 현실적 이유를 리영희 선생은 이렇게 전한다.

“자주 내려갔어요. 우선 순전히 물질주의적인 사회, 콘크리트 속을 떠나서 선생님 댁에 가면 아까 말한 것처럼 마당과 주변에 살고 있는 게 그냥 자연이니까, 하나도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손을 가하려고 생각지도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속에서 아주 차원이 다른 인간적 생존양식 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거든요.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생활에서 정신적인 생활로, 또는 현대 자본주의적인 생활에서 인간본연의 생활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군부독재 민주화운동의 행동양식으로 생각했던 맑시즘이나 사회결정론 또는 모든 것을 사회과학적 관점과 맥락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서양학문의 합리주의적 사고의 틀과 환경 속에서 나 또한 공부하고 가르치고 사회활동도 하곤 했는데, 종종 벽에 부닥치곤 해요. 그럴 때 원주에 내려가면 그런 벽이라든가 인위적인 방법의 한계 등이 동양적 사상의 지혜로써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같은 책, 133~134쪽)

실제로 장일순 선생은 경황없이 정치적 어젠다만 따라가는 운동을 비판하면서, 민감한 통일운동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내면의 생활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서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통일운동도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문제라고 봐요. 지금 더러 통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온단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들 통일운동을 북쪽하고 하는 건가?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자네들 국민하고도 통일운동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얼 북쪽하고 통일운동을 해? 또 나아가서 남한 내부가 지역감정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는데, 그 이해관계도 감정적으로 골이 깊은데, 그런 통일운동도 못 하면서 뭐 어디하고 통일운동을 해? 나는 이해가 안 돼.”(「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녹색평론사, 2013, 119쪽)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생각하자면, 김지하와 김민기, 리영희 선생을 떠나서 말할 수 없다. 시와 노래와 정론직필의 힘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장일순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당시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 선생을 통하여 자신의 숨겨진 은밀한 갈망을 확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 은밀한 갈망을 알아주는 이”가 원주에 있으니 숨통이 막힐 때마다 그이를 찾아간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 언론인, 교수의 직함을 내려놓고도 나를 본연의 ‘사람’으로 알아주는 이가 있어 원주가 그리운 것이었다.

감옥에서 수행하다

리영희 선생은 1977년 「8억 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을 출간하면서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른바 잡범들과 한방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다룬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이란 글에서 리영희 선생은 0.9평의 감방 안에서 겨울엔 동상에 짓무른 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여름엔 구더기와 함께 밥을 먹어야 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당시 감옥에는 조금이라도 이념적인 책은 반입이 안 되었다. 반면 종교 서적은 자유롭게 받아볼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은 불교 서적을 읽으면서 부처님이 한 초동에게 베푼 일화에 감동한 적이 있다.

한 초동(樵童)이 부처님께 300 제자들과 동석해 설법을 듣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감히 자신들과 한자리에 앉아 설법을 듣겠다는 이 초동이 청을 불쾌하게 여겨 무시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에게 설법을 듣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흙 묻은 신발 300켤레를 닦으라고 일렀다. 초동은 여러 달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제자들의 신발을 닦았다. 그가 성심을 다해 신발을 닦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도 그를 점점 존중하게 되었고, 이 일을 지켜본 부처님은 “나는 너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며 제자들에게 이 초동의 행덕을 따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리영희는 깨달은 바가 있어 지식인이 지닌 ‘먹물 기질’을 벗겨내기 위해 옥방의 변기를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리영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티가 있다는 것은 눈에 티가 끼어 있다는 뜻이며, 밖에 있는 티를 못 보는 것은 마음의 눈에 티가 끼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콘크리트 변소바닥의 오물과 티를 닦는 일은 곧 마음의 눈, 마음의 거울에 묻어 있는 더러움과 티를 닦아내는 일이었다.”(「스핑크스의 코」, 리영희, 까치, 1998, 16쪽)

한편 장일순 선생의 경우에도 5.16쿠데타 이후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사상범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1961년부터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당시 장일순 선생 역시 감옥생활을 수행의 기회로 삼았다. 이와 관련해 1987년 치악산에서 열린 한살림 연수회 강연에서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전한다.

“철창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으면 남은 밥을 내놓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새들이 와서 이걸 먹어요. 또 감방에 구멍이 뚫려 드나드는 쥐가 있잖아요. 그런 기색이 있으면 쥐를 위해 밥을 남겨놓는다구. 그러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새와 그 쥐가 친구가 돼버려. 갈 생각을 않는단 말이야. 항상 밥을 놔두니까. 그러니까 입으로 ‘쮜쮜쮜쮜’ 하면 쥐가 가까이 오고 또 이렇게 바투 오라고 하면 손에도 타고 몸에 와서 놀기도 하고 이런다고. 쥐가 그렇게 가까이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쥐에 대해서 무심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따뜻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바로 내가 너다’ 하는 거나 다름없거든. 그런데 ‘저 배라먹을 짐승!’ 이렇게 되면 쥐가 가까이 안 온다 이거야. 그러니까 생명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추운 티가 없어야 돼, 장벽이 없어야 돼.”(「바위 위에 핀 꽃」, 강원민주재단, 2023, 104쪽)

▲장일순 선생이 회갑을 기념하여 리영희 선생에게 선물한 ‘寒梅春心(한매춘심)’ 액자와 돌에 새긴 도장 (출처: 리영희재단 제공)

종교의 본질을 보다

리영희 선생은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잔인무도한 행위를 본 뒤로는 차라리 신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 베트남 전쟁터를 순회하는 미국인 군종들이 베트남 군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하거나 인류의 적으로 단죄하면서 미국인의 베트남인 말살행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종교예식을 뉴스에서 많이 목도했다. 신에게도 국적이 있는 것일까? …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외국인 대리자를 시켜서까지 민족의 불행한 골육상잔의 한쪽을 편들 만큼,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일까? 신이 자기 모습대로 만들었다는 인간들을 시켜서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살육과 파괴행위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중얼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이 없거나 종교가 없다면, 인간들은 차라리 평안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가?’ 신은 자기 이름으로 ‘영혼’을 구해준다면서 영혼이 깃들어 있는 얼마나 많은 육체를 파괴해 버렸는가? 그리고 지금도 파괴하고 있는가?”

이런 리영희 선생이 샤를 드 푸코가 창립한 ‘예수의 작은 형제들의 우애회’를 “가장 아끼고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흥미롭다. 이 형제자매들은 “구원의 정신이, 그들이 있는 곳의 가장 불우한 이웃, 가장 소외된 사람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동포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그 모든 인간의 고통을 참고 나누고 그리고 함께 노동하는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수도자들”이라고 소개한다.(「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리영희, 창비, 2020, 541~548쪽 참조)

리영희 선생은 종파주의를 넘어서 구체적인 인간 상황에 응답하는 종교에서만 의미를 찾았다. 이런 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장일순 선생의 입장은 매우 고무적인 태도였다. 원주에서 재해대책사업을 전개하면서 독일의 미제레올와 카리타스에서 291만 마르크(약 3억 6천만 원)의 긴급구호 자금이 들어왔을 때, 이 돈을 교회가 아닌 지역사회로 돌리자고 지학순 주교에게 합의를 끌어낸 사람도 장일순 선생이었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구원이 교회 문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 이때 장일순 선생이 남긴 말은 유명하다. “교회는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장바닥 같은 성전이 아니며, 신앙을 강요하거나 돈과 신앙을 맞바꾸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두고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위당 선생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사상들을 아무 모순 없이 커다란 용광로처럼 융화시켜 나가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 인간의 크기에 압도됩니다. 무위당 선생은 천주교 신자이었지만 그분의 생활양식은 노자적이면서도 불교적이고, 불교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의 생활양식은 단지 가톨릭의 규율이나 범주에 매이지 않았어요. 어떤 이념이나 종파에도 얽매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무위당사람들」, 2022년 7월 호, 16쪽)

한겨울 매화의 봄마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평생 없을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내내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이는 저이에게 흠결 지닌 그대로 친밀한 동무요, 뜻을 나누어 가진 동지요, 먼 길을 마저 걸어가는 도반이요, 마침내 내 귀한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연인이어야 한다. 리영희 선생과 장일순 선생은 드러난 몇 마디 이야기 밖에는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치악산 계곡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다른 이 없고, 두 사람만의 은밀한 비밀로 간직한 채 이승을 떠났다. 리영희 선생과 장일순 선생 사이에 개입된 것은 이해관계가 아니었고, 다만 이런 통정(通情)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원주 가톨릭센터 근처에서 목공예를 하던 김진성이란 친구에게 장일순 선생이 찾아왔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이었다. “얼굴 좀 씻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서 하면 되냐?” 마침 깨끗한 수건이 없던 김진성은 가슴이 철렁했다. 먼지와 때에 절은 수건 하나가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장일순이 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김진성은 그 수건을 들고 어쩔 줄 모르며 서 있었다. “수건이 이것밖에 없는데….” 장일순 선생은 웃으며 수건을 받아 천천히 얼굴의 물기를 닦고서 말했다. “네 땀내가 아주 좋구나.”

오직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만을 귀하게 여겼던 장일순 선생을 리영희 선생은 좋아했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1989년 「한겨레신문」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방북 취재 계획을 추진하다가 구속되어 반년가량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지 두 달 반이 지난 12월 2일 회갑을 맞았다. 이때 장일순 선생이 회갑을 기념하여 ‘寒梅春心(한매춘심)’, “한겨울 매화의 봄마음”이라는 글씨를 리영희 선생에게 선물하였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초 속에서도 매화가 전하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였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성정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희망이 될 만한 힘을 길어 올렸던 장일순 선생과 리영희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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