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벗 삼아 살아야만 했던 지난날. 그런데 실은 그런 내게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갑작스레 찾아온 이로부터 듣게 된 놀라운 비밀은 너무나 뜻밖이라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석연치 않던 의문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진 순간,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토록 거짓말 같은 사실을 전하러 달려갔으나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네가 후계자가 되려면 네 앞의 여덟 명이 죽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일어나고야 만다. 하이허스트 성의 새로운 주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이스퀴스 백작’의 화려한 등장이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이하 ‘젠틀맨스 가이드’)>이 지난 7월 6일 화려한 개막을 알렸다. 2018년 한국 초연 이후 어느덧 네 번째 시즌이다.
토니어워즈 4관왕, 드라마데스크어워즈 7관왕, 외부비평가상 4관왕 등을 거머쥐며 브로드웨이를 휩쓴 웰메이드 코미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이 호니먼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의 자서전>에 기반해 탄생했다.
블랙 코미디 장르에 오페레타 형식을 접목한 작품답게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이 동시에 묻어난 뮤지컬로 극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신분이 낮은 영국 청년 몬티 나바로가 뒤늦게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자기 자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재기발랄하게 그렸는데,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귀족 가문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해 가는 과정이 무척 기발하다. ‘살인’, ‘죽음’ 같은 소재로부터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꽤 모순적이지만, 그래서 더 참신하다.
작품을 보다 보면 어느새 몬티의 성공을 바라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게 되기도 한다. 게다가 다이스퀴스 역은 한 배우가 약 15초 만에 퀵체인지를 거듭하며 무려 아홉 명의 ‘다이스퀴스’를 맡아 연기해야 한다. 여기에 세속적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 몬티의 연인 시벨라 홀워드, 몬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인 피비 다이스퀴스 간 대비 구도도 직관적이면서 재미있다. 특히 두 캐릭터는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 의상을 착용하며 시각적으로도 팽팽하게 대립해 볼거리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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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공연사진 ⓒ쇼노트
이처럼 개성 가득 캐릭터의 향연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에 더해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유쾌하게 풍자한 <젠틀맨스 가이드>는 관객들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사하며 다시금 사랑받고 있다.
작품은 새 시즌을 준비하면서 또 한 번 새로움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무대와 영상의 진화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몬티의 회고록을 무대 위에 구현한 점이 특징인데, 그 모습이 마치 입체 팝업북 같은 느낌이어서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고층 교회 탑, 연말 느낌이 물씬 나는 스케이트장, 벌떼가 날아드는 양봉장 등 실감 나는 장면들이 연이어 펼쳐지는 순간, 시간이 흐를수록 몰입감은 최고조로 향한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장면마저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영상 연출은 <젠틀맨스 가이드>만의 매력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신선한 출연진 조합도 기대를 모았다. 먼저 몬티 나바로 역에는 송원근, 김범, 손우현이 캐스팅됐다. 이중 김범과 손우현은 <젠틀맨스 가이드>로 처음 뮤지컬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며 일찍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아직 조금 더 다듬어져야 좋을 점도 보이지만, 능청스럽고 실감 나는 연기가 앞으로 더 큰 발전을 기대케 한다. 또 1인 9역을 선보일 다이스퀴스 역에 정상훈, 정문성, 이규형, 안세하, 시벨라 홀워드 역 허혜진, 류인아, 피비 다이스퀴스 역 김아선, 이지수 등이 함께하며 무대를 가득 채운다.
배우마다 캐릭터를 강화하는 방식이나 애드리브가 조금씩 다른 점 역시 재미있다. 자연스럽게 페어마다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나 연기 합이 달라져 다회 관람은 기본이다. 배우가 이전에 출연했던 작품에서 애드리브 아이디어를 가져오거나, 각 배우의 특징을 살려 연기에 녹여내면 객석은 곧바로 웃음바다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다거나 선을 넘는 경우는 없다. 전체를 아우르면서 공감대 형성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프로 배우들 덕분에 작품이 가진 장점이 더욱 빛을 발한다.
‘몬티 다이스퀴스’의 험난하고도 유쾌한 ‘귀족 가문 복귀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을 끝까지 놓치지 말 것. 공연은 10월 20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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