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고 기온 기록이 연일 경신되고 있다. ‘가마솥더위’ ‘불볕더위’라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말 그대로 무더위 기세가 ‘괴물’에 가깝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괴물폭염’이 바꿔놓은 일상을 들여다봤다.
(서울=뉴스1) 남해인 기자 = “6개월 잘 달려왔는데 너무 더워서 밤에 잠을 설치네요. 속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대학 가야죠.”
서울에 폭염 경보가 내려진 2일 오후 2시쯤 서울 강남구 대치2동 골목길 한 다세대주택 앞. A 씨(19)는 이제 막 집에서 나왔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폭염경보는 최고 체감온도 35도를 넘는 상태가 이틀 이상 계속되거나 더위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내려진다.
재수생인 A 씨는 올해 11월 치러질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충남 서산에서 서울로 상경했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5평 남짓 반지하 방을 구했다.
A 씨의 집은 창문을 열어 놓아도 여름엔 바람이 전혀 들지 않는다. A 씨는 좁고 푹푹 찌는 반지하 방이 마치 ‘밥솥’ 같다고 했다.
재수생 대부분은 하루 세 끼 식사를 제공하는 고시원 형태 숙소인 ‘학사’를 선택하지만, 최저 월 120만 원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들은 보증금과 월세가 저렴한 반지하 방을 얻는다.
스무살이 되자마자 홀로 서울 반지하에서 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온몸으로 느낄 때면 더 서럽다. 올해 ‘역대급 폭염’으로 열대야가 계속되면서 A 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잠을 설치면 다음 날 수업에서 졸기 일쑤였다.
A 씨는 “장마가 지나 침수와 곰팡이 걱정은 덜었지만 여전히 집에 있는 건 너무 답답하다”며 “전날 잠을 설치면 내가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 길은 오직 인서울, 명문대에 가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틴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문대’ 진학 열망의 끝이라는 대치동 학원가 뒤편 골목에는 재수생들이 살고 있다. 월 200만 원 학원비를 감당하면서도 ‘수능 만점자’를 배출한 유명 재수학원에 다니기 위해, 맨눈으로는 판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단과 멀리 떨어져 앉더라도 ‘일타 강사'(‘일등 스타강사’의 줄임말)의 현장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는다.
대치동 반지하 방 학생들은 이 경주 대열 끝자락을 붙잡고 본격적인 입시가 치러지는 11월만을 바라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반지하 방은 대부분 구축 다세대주택에 있어 시설이 열악하고 더위에 취약하지만, 식지 않는 학원가 열기 탓에 월세는 웬만한 대학가 다세대주택 지상층 방과 맞먹는다.
유명 재수학원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 뒤편인 대치2동 골목길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 B 씨(60대)는 “올해 반지하 시세는 보증금 500만~1000만 원에 월세 50만~60만원”이라며 “돈이 없는 학생들은 별수 없으니 반지하로 많이 온다”고 설명했다.
다른 공인중개사 C 씨는 “반지하는 보증금 550만 원에 월세 60만 원이 주로 나가는데 학생이 못 버틸까 봐 3개월 단위로 단기 계약하기도 한다”며 “대부분 학사로 많이 가지만, 학사를 못 가면 반지하에 온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반지하 방에 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나는 대치동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위안으로 삼는다고 입을 모았다.
제주에서 상경해 대치동의 다세대주택 6평 규모 반지하에서 재수 생활을 하고 있는 김 모 씨(19)는 “방 값이라도 아껴서 이곳에 있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며 “재수학원 정규 학원비와 교재비, 특강비를 합하면 이미 한 달에 200만 원은 들어서 학원에서 급식 도우미 알바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히 쉴 수 있어야 하는 집이 가장 덥고 불편한 공간이 된 현실이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김 씨는 “나는 이미 나올 때부터 지쳐있는데 부모님이 시원한 차량으로 데려다주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려면…”하며 말끝을 흐렸다.
4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서울은 낮 최고 체감 온도가 35도를 웃도는 찜통더위가 이어진다. 열흘 이상 열대야가 계속되는 등 밤사이에도 더위가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열대야는 오후 6시 1분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최저 기온이 25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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