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기억의 그림, 아침(Aatchim) 김조은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귀국해 여는 첫 개인전 〈최소침습〉은 글래드스톤이 선보이는 최초의 한국인 작가 전시이기도 하다. 감회가 새롭겠다 아직도 꿈같다. 어제 오프닝 행사를 치렀고, 오늘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최소침습’은 본래 신체적 위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외과 수술 용어가 아닌가. 실제 경험에서 나온 제목인지 재작년 겨울에 수술을 받았다. 병명은 호두까기 증후군. 당시 받은 수술법이 최소침습인데, 이 단어의 의미가 나라는 사람과 굉장히 맞닿아 있다. 일종의 인생관이랄까. 나는 표면에는 아주 작은 흔적을 남기지만, 실은 깊게 들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밀도 높고 효율적인 사람. 최소한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바라면서도 누군가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최소침습〉 프로젝트는 한자 뜻에 따라 ‘최最/소小/침侵/습襲’ 네 장으로 나뉜다. 귀국해 처음 선보이는 전시에서는 ‘작음’ ‘적음’ 등에 주목한, 그중 가장 아름다운 챕터인 ‘소小’만 펼쳤다. 고통, 돌봄, 사랑 등 다층적인 복잡성을 수반하고 개인사에 기반을 둔 기억을 가시화했다. 투명감마저 느껴지는 작품에선 어떤 낭만이 풍기는 것 같다. 프로젝트의 다른 챕터에는 편지 형식의 글도 포함돼 있다고 수술해 주신 선생님이자 최소침습술의 대가인 의사의 성이 ‘홍’이어서 닥터 H에게 쓴, 절대 보낼 수 없는 편지로 볼 수 있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살면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실제 상황에서는 진짜 내 사정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의사 앞에 누운 나라는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었던 말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하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한 데서 이 작업이 시작됐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에 관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기억술의 일종인 ‘기억의 궁전’ 개념을 참고해 사물과 공간, 인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구축했다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이를 작업에 참고하게 된 배경이 있는지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기억법이 ‘기억의 궁전’이다. 나에게 친숙한 공간을 상상한 다음, 외워야 할 목록을 그 공간에 그리고 동선만 외우는 방식이다. 이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 기억술이 ‘기억의 궁전’과 같다. 나는 극도로 생생한 정신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하이퍼판타지아(Hyperphantasia)’가 있다. 나에게 기억이란 항상 섬광처럼 보이는, 현실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인 장면이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인가? 경험한 순간을 기억에만 의존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만큼 공간에 대한 정보만 있으면 투명하게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다. 2019년부터 작업할 때 외부 레퍼런스를 전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내가 그린 이미지가 아무리 이상해도 내 기억에서 나온 것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이퍼판타지아를 지닌 입장에선 어떤 레퍼런스도 보지 않기로 한 결심을 이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욕망이 그런 작업을 촉발한 걸까 떠오른 것을 빨리 그려야겠다는 거의 신경증적인 욕망. 지금 이것을 기억하고, 그려내지 않으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림으로 남긴 기억, 그런 장면을 만드는 일이 내가 가진 ‘슈퍼 파워’다. 나는 살면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술을 하면서 가끔씩 사는 것 같다. 작업하러 갈 때도 작업 외엔 무엇도 하지 않는다. 정말로 가만히 있는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면서. 오롯이 기억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위해 필요한 환경 요건도 있을지 고립된 환경을 만든다. TV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방에 나와 침대, 고양이 그리고 내 그림뿐이다. 모든 것을 덜어낸 환경에서 밀도 높은 작업을 하고 싶어서다. 기억 혹은 머릿속에 있던 장면을 실크라는 투명감 있는 재료 위에 표현해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 역시 당신의 모든 기억이나 생각을 관통하는 부분인가 나는 이 전시도 브로슈어가 출력돼 나올 때까지 혹시 내가 상상하는 일이 아닐까 했다. 내 상상이 워낙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실제 현실과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전시에 선보인 작품 속 이미지는 여러 개의 중첩된 선으로 드로잉돼 있다. ‘여러 번 그린다’는 것, 그런 흔적을 남기는 일은 왜 당신에게 중요할까 나는 입체맹이다. 두 눈의 시야가 한 장면에 작동하지 않는다. 눈 두 개가 일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입체를 만든다. 드로잉으로 생각의 과정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원한다면 드로잉을 고치고, 고친 흔적을 남겨둘 수도 있고. 내가 추구하는 모든 작업의 목표는 초고 상태 그 자체이고 과정이 중요하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일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기억은 한 번씩 꺼낼 때마다 조금씩 흐트러진다고 한다. 기억이란 딱 한 번 잘 꺼내보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러기 위해 그림으로 옮긴다. 기억을 구현하며 작업방식이 단출해졌다. 생각해보면 대학원 시절에는 레퍼런스를 많이 쓰는 컨셉추얼한 작업이 많았다. 에라스무스도 조사해야 하고, 사포(sappho)도 알아야 하고…. 내 맥락에 오류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기억을 주제로 하면서 어느 순간 그런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포옹하거나 위로하는 듯한 모습이 여러 시점으로 투명하게 겹쳐서 표현돼 있다. 사람의 ‘관계성’ 역시 자주 들여다보는 주제인가 정확히 봤다. 내가 시도하지 못한 관계성, 누군가와 접촉하는 일을 어려워하는 나, 내 삶을 스치고 지나간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 엉겨붙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글을 쓰는 문장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쓰는 소리를 담은 오디오 설치미술 작품들도 함께 소개했다. 그리기와 쓰는 일은 어떤 식으로 구별되나 구별되지 않는다. 무수히 그리는 것과 비등하게, 수없이 쓴다. 전시에는 적은 양을 선보이지만 하루에도 굉장한 양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쓰는 일은 내 습관이자 살아온 방식이다. 언제부터 그리는 일에 이토록 천착했나 어려서부터 부끄러워 말은 잘 못 하고 늘 그림만 그렸다. 그림 안에서는 내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그림은 내 거니까. 나는 진짜 ‘내추럴 본 드래프츠맨’이다. 아마 눈이 가진 장애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다빈치도 나처럼 외사시를 지닌 사람이었다. 외사시가 드로잉에 유리하다는 조사도 많다. 그리지 않아도 내 세상은 이미 2D다. 아침 김조은에 관한 가장 무용한 정보를 궁금해한다면 어떤 답을 들려줄 건가 예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 14년 동안 뉴욕에 살았지만 여전히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나는 환각 상태니까. 내 머릿속은 이미 분주하고 현란하다. 무엇을 보든 이미지화돼 머릿속에 저장된다. 언제나 과자극 상태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람이며, 맞서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슈퍼마켓에서 내가 고르지 않은 물건이 내 바구니에 들어 있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기 싫어 그냥 ‘괜찮네’ 하며 사버린다. 모든 에너지는 오직 작업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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