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농 김가진 선생(1846~1922)의 서예전이 국내 최초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지금껏 ‘독립운동가·애국계몽가’라는 명성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서예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후손에 전래된 유묵과 여러 기관의 소장품을 한자리에 모아 김가진의 서예 세계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농 김가진 서예전 <백운서경>은 지난 23일 개막, 오는 9월 19일까지 제1전시실, 제3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동농문화재단이 주최하고 동농 김가진 서예전 추진위원회에서 기획했으며, 진행은 동농문화재단과 한국고간찰연구회가 맡았다.
이날 서예전 개막에 앞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참석해 서예전에 대해 설명하고, 전시회장을 돌아보며 작품 해설을 도왔다.
유 전 청장은 “시와 글씨의 대가였던 동농 김가진 선생의 서예전을 102년 만에 처음 열게 됐다”면서 “이번 전시에서 독립운동가, 애국계몽가로서 명성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김가진의 서예 세계를 재조명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전 청장과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김채식 경운초당 대표는 전시 종료일까지 매주 화요일 도슨트를 교대로 진행한다.
이날 3시 열린 개막식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이종찬 광복회장,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김채식 경운초당 대표, 이동국 경기도박물관 관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창덕궁 편액을 비롯해 유명 사찰의 현판과 간찰, 그리고 김가진 선생이 직접 지은 한시 등 200여 편의 작품을 관람했다. 개막식 도슨트 투어는 유 전 청장이 맡았다.
유 전 청장은 “동농은 위대한 작품을 남긴 시인이자 서예로도 당대 살았던 우뚝한 거봉이었다. 예술가적 사명을 가진 인물”이라며 “서거 102주년이 돼서야 전시회를 연 것이 무척 아쉽다. 이런 전시는 국가기관에서 주관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의 증손녀인 김선현 동농문화재단 이사장은 “이번 전시는 예술이자 우리의 역사”라며 “동농문화재단은 앞으로 우리의 시대정신과 우리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전했다.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의 대신이자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당대 최고 서예가로 평가된다.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해 총재로 활약했고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서 항일투쟁을 한 그는 명필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서화계의 막후 조력자로서 1918년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단체로 창립된 서화협회의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전시 제목은 ‘김가진 선생의 서예 경지’를 뜻하는 <백운서경>이다.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백운동 골짜기에 백운장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백운동주인이라고 한 일을 기렸다. 지금도 백운동 골짜기의 암벽에는 김가진 선생이 쓴 거대한 ‘백운동천’ 글씨가 남아 있다.
어릴 적부터 서예에 심취해 한국과 중국의 역대 명서가들의 글씨를 두루 학습한 그는, 중국의 미불과 동기창, 조선의 원교 이광사 서풍을 자기화한 이른바 ‘동농체’라 불리는 행서·초서 서풍을 완성했다.
대자의 현판 글씨에도 능해 당대부터 수많은 글씨 요청을 받았다. 지금도 전국의 사찰과 사대부 집안, 창덕궁 후원 등에 그의 글씨가 다수 걸려 있다.
전시는 선생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은 7개 섹션으로 구성했다. 그의 평소 신조와 삶의 지향이 반영된 인장 문구를 차용해 섹션별 제목으로 삼았다.
동농문화재단은 김가진 선생의 편지와 시축, 병풍, 비문, 현판, 암각글씨, 인장 등을 선별, 그가 가진 서예의 경지가 얼마나 넓고 높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개화기의 문인 관료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시단(詩壇)과 서단(書壇)의 원로로서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게 했다.
제1부는 ‘세독충정(世篤忠貞), 대대로 지켜온 충심과 절개’라는 주제로 김가진 선생의 가문과 생애를 담았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인 그는 가문이 지켜온 충절과 전통을 목숨처럼 여겼다. 개화기 때 고종을 보필하며 나라의 개화와 국민의 계몽에 힘썼고, 국권이 피탈되자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고문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도 그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제2부 ‘지단정장(紙短情長), 종이는 짧고 정은 길어’는 김가진 선생이 아들의 교육을 위해 쓴 한글 글씨와 천자문, 부인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편지, 벗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품평한 편지 등을 전시했다. 특히 선생의 작은 글씨들을 주로 모았다. 글자 사이사이에 깃든 따뜻한 정을 읽을 수 있고, 그의 세련된 소자서(小字書)의 멋을 음미할 수 있다.
제3부 ‘시서돈숙호(詩書敦宿好), 시와 글씨는 내 오랜 벗일세’에서는 김가진 선생이 시와 격언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장기인 송나라 미불과 명나라 동기창, 조선시대 이광사의 서체를 소화한 동농 서풍의 진수를 만나게 된다.
제4부 ‘종오소호(從吾所好), 내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에는 김가진 선생이 서화가들과 교우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가진 선생은 서화 감상을 좋아해 김석준, 안중식, 김규진, 지운영, 이도영 등 당대 최고의 서화가와 교유하며 막후에서 그들의 활동을 조력하기도 했다.
그는 오세창, 안중식, 이도영 등과 함께 최초의 근대식 화랑인 서화포를 개설하려고 했고, 1918년에는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단체로 창립된 ‘서화협회’의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독립운동가(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서화계의 종장이었던 오세창(吳世昌)과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김가진 선생의 서화계 활동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제5부 ‘전명천년(傳名千年), 천년 뒤에도 이름이 전해지리’에는 김가진 선생의 각서와 비문, 현판 글씨를 만날 수 있다. 김가진 선생은 고위관료였고 또 당대부터 글씨로 유명했기에 비문과 현판 글씨 요청을 수없이 받았다. 창덕궁 후원에 걸린 현판은 거의 다 그의 글씨인데, 이번 전시에는 창덕궁에 현전하지 않는 현판 글씨도 출품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김가진 선생의 대자서도 이번 전시에 다수 출품됐다.
제6부 ‘단구무괴아심(但求无愧我心), 다만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기를’에는 김가진 선생의 동지, 개화파와 독립운동가 관련 글씨를 담았다. 그가 평생의 벗이자 개화사상의 인도자였던 이조연에게 바친 제문, 을사늑약 때 순절한 충정공 민영환을 애도하며 쓴 만장, 상해 임시정부 망명 시절 독립지사들을 위해 쓴 글씨가 출품됐고, 독립운동가 오세창, 김구, 신익희가 김가진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써 준 글씨도 함께 나왔다.
마지막 주제인 제7부 ‘아심어차(我心於此), 내 마음이 여기 있다네’에는 후손가에 전하는 김가진 선생의 인장 40여 점을 전시했다. 전시의 소주제 제목으로 차용한 문구처럼 그의 평소 마음과 지향을 읽을 수 있는 문자 도장들도 다수 만날 수 있다. 김가진 선생은 서예 작품의 내용과 목적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인장을 사용했기 때문에, 인장은 그의 서예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구다.
매주 화요일 오후 3~4시에는 현장 강연도 진행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8월 13일), 이동국 경기도박물관 관장(7월 30일, 8월 20일, 9월 3일), 김채식 경운초당 대표(8월 6일, 8월 27일, 9월 10일) 등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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