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낙점돼 일약 스타덤에 오른 J.D.밴스(39)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은 차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금수저’ 트럼프와 달리 자신의 ‘흙수저’ 배경을 내세워 유권자를 공략하고 있는 그는 쇠락한 공업지대(러스트벨트) 백인 노동자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가정 폭력과 무기력 속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밴스의 이야기를 담은 베스트셀러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는 그의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 재조명되고 있다. ‘힐빌리'(hillbilly)는 밴스가 살았던 미국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백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밴스는 1984년 공업도시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2번이나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순탄치 않은 가정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모친은 밴스가 유아였을 당시, 그의 생부와 이혼하고 세 번째 남편을 맞았다. 밴스의 이름은 새 아버지의 성을 따라 개명했다가, 이후 그를 키워준 외조부모의 성을 따라 현재의 ‘J.D.밴스’가 됐다.
모친의 거듭된 이혼과 재혼 속에 아버지가 늘상 바뀌던 밴스의 유년기는 약물 중독에 빠진 모친의 폭력 아래 놓였다. 밴스가 12살이던 때, 그의 모친은 도로에서 시속 160㎞로 차를 몰아 가족 모두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 일로 그의 모친은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고, 그는 외조부모 곁에서 지내게 됐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밴스의 곁에는 그를 정성으로 보듬은 외조부모와 이부 누나 린지가 있었다. ‘할모'(mamaw)라는 애칭으로 불린 외할머니는 200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밴스가 엇나가지 않도록 사랑과 위로로 그를 돌봤다.
밴스는 17일(현지시간) 전당대회 부통령 수락 연설에서 “할모는 어머니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는 동안 나를 친아들처럼 키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5살 많은 누나 린지는 방임적인 모친을 대신해 밴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모친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했다.
외할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긴 했지만 밴스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은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유급 위기에 몰릴 정도로 숙제를 하지 않고, 무단결석을 하는 등 학업에 소홀했다. 마약에 탐닉하고 이렇다 할 꿈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밴스는 이를 가리켜 ‘학습된 무기력’ 탓에 본인들이 낙후된 처지로부터의 ‘계층 이동’을 포기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파괴된 가정 생활과 빈약한 공교육 체계 아래에서 교육과 미래 설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살아갔던 ‘힐빌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나락에 가까워지던 밴스의 인생은 지인의 추천으로 미 해병대 입대를 준비하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애국심에 찬 청년들의 입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학 진학과 입대 사이에 고민하던 그는 이후 전역 장병에 대한 혜택을 기대하며 이라크 전쟁 발발을 앞두고 군인이 됐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의 군 복무 기간은 그에겐 ‘전환점’이 됐다. 밴스는 회고록에서 “해병대는 내게 처음으로 진정한 실패의 기회를 줬고, 그 기회를 잡게 했고, 실패했을 때도 다시 기회를 줬다”고 적었다. 밴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제2해병항공단에서 언론과 외부 홍보를 담당하는 공보를 맡았다. 2005년 말에는 당시 전쟁 중이던 이라크에 6개월 동안 파병돼 여러 부대 활동을 기록했다.
전역을 9개월 앞두고 부대의 공보 책임자가 된 그는 많은 미디어와 접촉하는 일을 맡았다. 밴스는 회고록에서 “그때 경험은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다”며 “TV 카메라가 내 얼굴 앞에 있어도 명확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군 생활 동안 여러 훈장과 공로상을 받는 등 자신감을 축적하며 인생의 ‘반전’을 향한 디딤돌을 쌓았고, 전역 이후 대학 및 로스쿨로 진학하며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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