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남해인 기자 = “쌤, ○○○(아이돌 이름) 뚱뚱해 명품 앰버서더(홍보 모델)에서 잘렸대요!”
부산의 한 초등학교 6학년 교사인 이 모 씨(39)는 최근 아이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다. 구독자 29만 명에 달하는 사이버 레카 A 씨가 유튜브에서 여성 아이돌을 비방하며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그대로 이 씨에게 얘기한 것이다.
이 씨가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고 물었지만 더욱 기막힌 답변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조회수 몇 십만인데 아직 못 보셨냐”고 이 씨에게 반문했다. 이 씨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알려줘야 할지 막막한 지경”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유명 유튜버 쯔양 협박’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일명 ‘사이버 레커’를 향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유튜버 쯔양은 구독자 수가 104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연예인급 인기를 누렸다. 그런 쯔양조차도 사이버 레커들의 협박 대상이 됐다. 사이버 레커로 의심받는 구제역은 쯔양에게 폭로를 무마하는 조건으로 5500만 원을 갈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유튜버 전국진은 구제역을 통해 300만 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문제는 이들의 위법성·유해성 콘텐츠가 성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씨의 학생들 같은 10대 아이들은 사리 분별이 미숙해 사이버 레커의 악영향에 더욱 취약해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사이버 레커는 가상 공간을 의미하는 ‘사이버’와 사고 차량을 견인하기 위해 출동하는 ‘레커’를 합성한 말이다. 사실상 자율 규제로 운영돼 무법지대인 유튜브에서 사이버 레커들은 유명인의 외모와 인성을 헐뜯고 자극적이고 허위 사실에 해당하는 가짜 뉴스 콘텐츠로 조회 수를 올리며 수익을 챙기고 있다.
아이돌 장원영과 배우 강다니엘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이버 레커 B 씨가 대표적이다. B 씨는 ‘국민 남친 배우 아이돌의 문란한 사생활’ ‘팬에게 거짓말하다가 허언증 딱걸린 아이돌’ ‘명품 브랜드 패션쇼에 중고 명품 입고 간 아이돌’ ‘아이돌 성형 증거’ 영상 등을 올렸고, 회당 조회수는 최대 200만 회에 이르렀다.
이런 콘텐츠들이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아 상위에 노출돼 성인 뿐만 아니라 청소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유튜브는 ‘키즈’ 버전 애플리케이션을 따로 운영하지만 정보기술 활용에 익숙하고 스마트폰이 있는 청소년들은 이런 콘텐츠들을 제한 없이 접하고 있다.
‘유튜버’가 청소년 장래희망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만큼 이들이 생산하는 유해성 콘텐츠를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경기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1학년 담임교사를 맡고 있는 임 모 씨(28)는 “아이돌을 소재로 삼는 사이버 레커들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며 “그들의 활동명을 부르는 약칭이 있을 만큼 너무 익숙한 존재”라고 말했다.
임 씨는 “레커들이 올리는 영상은 가짜 뉴스도 많은 데다 아이들에게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내용이 많아 걱정”이라며 “정체성과 가치관을 확립해가는 시기 청소년들에게 이런 콘텐츠는 특히 더 유해하다”고 강조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유튜브엔 진실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하물며 청소년의 경우엔 더욱 쉽게 거짓을 믿어버릴 수 있고 그게 오랫 동안 완전히 사실로 뇌리에 각인될 수 있다”며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타인의 삶을 폭로하며 재미거리로 삼는 문화가 청소년에게 내재화되면 인권 의식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상위 노출 콘텐츠를 결정짓는 건 결국 이용자 대부분인 ‘성인’이라며 대중들의 소비 문화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알고리즘은 이용자들의 선호를 기반으로 계속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기능을 하고 콘텐츠의 다양성을 차단하는데, 이로써 청소년마저 유해한 콘텐츠에 계속 노출되고 그런 알고리즘 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하 평론가는 “사이버 레커들의 자극적인 콘텐츠를 너도 나도 클릭해서 알고리즘에 의해 상위 콘텐츠가 되고, 더 확대·재생산되는 구조”라며 “타인의 삶을 짓밟는 내용의 콘텐츠를 재미 거리로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하는 대중의 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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